빌브라이슨, <나를 부르는 숲>
나를 부르는 숲은 어디에 있을까
<나를 부르는 숲>은 빌 브라이슨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관한 기록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미국 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3,520킬로미터의 숲길이다. 조지아에서 시작해 메인주의 캐터딘 산까지 이어진다. 전 구간을 걷는 데에는 반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출발하지만, 끝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 길에서 내려오는 일은 실패라기보다 상황과 자신을 받아들이는 선택에 가깝다. 그래서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완주보다 태도를 묻는 길로 기억된다.
동행자는 스티븐 카츠, 오래전 함께 유럽을 여행했던 친구였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연락하지 않던 사이였다. 다시 말해, 특별히 가까운 관계도, 일상적으로 함께 걷던 사람도 아니었다.
어쩌면 카츠는 이 여정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과체중이고, 운동을 하지 않으며, 술을 많이 마신다. 트래킹 준비도 허술하다.
빌 브라이슨 자신이 책에서 여러 차례 밝히듯, 그는 장거리 트레킹의 이상적인 동반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빌은 그에게 전화를 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혼자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길고 외지고, 위험한 길. 그는 능숙한 동반자보다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 선택은 여정의 성격을 처음부터 결정한다.
이 여행은 이미 완주를 향해 곧게 정렬된 도전이 아니다.
불균형한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예측 불가능한 시간이다.
빌은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이고,
카츠는 반응하고 과장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끝을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지금을 버틴다.
그 차이는 길 위에서 자주 충돌하지만, 동시에 이 여행을 끝까지 정복의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게 만든다.
그들이 끝내 트레일을 완주하지 못했을 때, 두 사람의 태도는 조금 다르다.
카츠는 우리는 걸었다고 말한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은 사람이라고.
그에게 완주는 자격 조건이 아니다.
반면 빌은 아쉬움을 남긴다. 가지 못한 산과 보지 못한 풍경을 떠올린다. 그는 끝까지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그러던 그가 책의 말미에 이르러, 그 아쉬움마저 이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3,520킬로미터를 다 걷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시도했다. 카츠의 말이 옳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던 것이다. ”
- <나를 부르는 숲>, P.389.
이 문장은 실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실패를 정리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들은 산에서 내려왔고, 그 사실은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온 뒤, 그들은 메인주의 작은 마을에서 하숙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조앤 비숍이라는 노인을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오래된 집의 주인, 앞치마에 밀가루를 묻힌 채 문을 열어주던 사람이다.
그녀는 산을 헤매다 내려온 두 사람의 더러운
배낭을 보고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어디까지 갔는지, 왜 내려왔는지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이런 얘들 좀 봐.
곰들과 싸우다 온 것 같아!
얘들아, 올라가서 깨끗이 씻고 베란다로 내려와요.
냉홍차도 만들고, 레모네이드도 만들어둘게.”
"고마워요, 엄마"
이 장면에서 서사는 잠시 멈춘다.
걷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조앤 비숍은 이들이 무엇을 해냈는지보다 지금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먼저 알아본다.
성취를 묻지 않는 환대,
결과를 재지 않는 친절.
카츠가 78세 생일 때까지는 한번 다시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자,
그녀가 말했다.
"그럼, 너희들이 준비될 때까지 산은 그대로 있을 거야, 이 사람들아."
이 여행의 마지막을 결정짓는 장면은, 결국 이 할머니의 집이다.
내 삶을 돌아본다.
나이를 많이 먹었고, 30년을 훌쩍 넘게 같은 일을 해왔다. 이제 마지막 고지가 보일 듯 말 듯한 지점에 와 있다.
흔히 이쯤 되면 사람은 느긋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삶은 여전히 분주하다.
허겁지겁 움직이고, 사소한 일에 마음이 먼저 반응하고, 빨리 결정하고 마무리 지으려 바빠진다.
아직 닿지 못한 지점을 의식하며 미래를 걱정한다.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서두르는가.
돌이켜보면 오랫동안 삶을 체크리스트처럼 살아왔다.
해야 할 일, 끝내야 할 일,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할 일. 하나를 지우면 다음 항목이 나타나고, 그 목록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늘 아직의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아직 부족하고, 아직 더 가야 하고, 아직 증명해야 하는 사람으로.
빌 브라이슨의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트레일이 지겨웠지만, 여전히 트레일의 노예가 되었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되풀이하고 싶었다.”
지겹고 버겁지만, 완전히 놓지는 못하는 상태.
나는 이 문장을 걷기의 고백으로만 읽지 않는다. 오래 살아본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보며 할 수 있는 말처럼 읽는다.
삶은 체크리스트가 아니다. 삶은 반복 가능한 경험이다.
끝내지 않아도 다시 돌아올 수 있고,
완성하지 않아도 의미는 남는다.
우리는 늘 마침표를 요구받지만, 인생의 많은 순간은 쉼표로도 충분하다.
쉼표가 있기에 숨을 고르고,
다음 문장을 이어갈 수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삶을 정복하고 싶지 않다.
반드시 도달해야만 가치가 생기는 방식에도 조금은 지쳤다.
대신 이미 지나온 시간을 조급하게 재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루를 마치며 ‘오늘도 버텼다’가 아니라,
‘오늘을 잘 지나왔다’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지금의 나를 부르는 숲은,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시간,
중간에 내려와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자리,
이미 충분히 오래 걸어왔다는 사실을 조용히 인정해 주는 마음의 상태 그런 것이다.
빌 브라이슨은 끝까지 걷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숲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내려왔을 뿐이다.
나도 그렇다.
아직 여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삶을 끝내야 할 목록으로만 보지 않으려 한다.
그 깨달음이,
지금의 나를 부르는 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