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꿈을 꾸었다.
긴 복도가 보였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넓은 마루를 닦고 있었다.
닦아야 할 복도는 한참 남아 있었다.
서두르거나 한숨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걸레를 밀고 무릎을 옮기는 동작은 반복되었지만
초조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꿈인데도 유난히 현실적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한 사람이 보였다.
나와 달리 그 사람은 편안한 자세로 서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시선이 갔지만 비교는 거기까지였다.
저런 방식도 있겠지.
부럽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잠에서 깬 뒤에도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왜 길고도 긴 마루였을까.
꿈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요즘 나의 하루는 어느 때보다 바쁘다.
한 번에 해결되지 않는 일들,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책임들, 미룰 수도 피할 수도 없는 현실의
숙제들 그리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다.
정리해야 할 일과 새로 준비해야 할 일들이 겹치고
또 쌓인다.
꿈속의 마루는 지금의 고단한 삶 같다.
전날만 해도 참 많은 일을 했다.
오전에 출근해 강도 높은 일을 처리하고,
조퇴를 내고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친정으로 간다.
얼마 전 사고로 팔꿈치와 갈비뼈 골절로 수술을 한
어머니는 동생네에서 모시고 있다.
동생과 제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쌓여있는 공과금을 정리하고, 수많은 화초들에
일일이 물을 주며 비어있는 집을 정리한다.
어머니가 다니는 동네 병원에 들러 우여곡절 끝에
대리처방전을 받고, 찬 바람을 맞으며 우체국까지
걸어가 동생네로 보낼 등기를 붙인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를 잠시 만나 푸념을 늘어놓고
저녁 늦게야 집에 도착한다.
그렇게 하루는 빈틈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그런데 홀가분하다.
숙제를 잘 끝낸 듯 개운하다.
차근차근 일들이 줄어드는 것이 보인다.
미뤄두고 찜찜하던 것들이 해소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모든 것들은 지나간 일이 된다.
그러나 가만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태도가 바뀐다.
그리고 그날밤 꿈을 꾸었다.
단순한 정신승리였을까.
오래전 읽었던 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에서>가 떠오른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잃은 상태의 인간을 보았다.
가족도, 직업도, 미래도, 내일을 약속할 어떤
조건도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은 하루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는 그곳에서 질문했다.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끝내 살아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랭클이 발견한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강제수용소에서 그는 곧 죽음을 앞둔 한 젊은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절망에 잠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 운명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제멋대로 살았고 정신적 성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에서야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그녀에게 창밖의 나무 한 그루는 외로움을 달래주
는 유일한 친구였고, 그 나무는
“나는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라고 말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프랭클은 적는다.
그를 살게 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대하는
마음의 방향이었다고.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시련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과제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대신해 고통을 짊어질 수 없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p.120. 청아출판사 -
프랭클은 여기서 희망이나 낙관을 말하지 않는다.
수용소조차 인간을 자동으로 타락시키지 않으며,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매 순간 어떤
태도를 선택했는가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위 문단은 이렇게 읽힌다.
인간은 가장 비인간적인 조건 속에서도
끝내 ‘자기 자신이 될 것인가, 아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다.
문득 꿈과 겹쳐진다.
무릎을 대고 기나긴 복도를 닦고 있던 밤.
그 장면은 포기도 무기력의 상징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의 조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삶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개의 과제를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돌봄과 책임, 일과 관계, 정리되지 않은 현실들
속에서 매일 각자의 마루를 닦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서서 닦고,
누군가는 무릎을 대고 닦는다.
범위의 차이도, 능력의 문제도 아니다.
지금 그 사람이 서 있는 삶의 깊이와 위치의
차이다.
삶은 한 번에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으면 반드시 줄어든다.
" 나는 지금도 아우슈비츠에서 맞은 두 번째
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음악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 바이올린이 흐느끼듯 토해내는 애끓는
탱고 선율이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바로 그날은 어떤
사람이 24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이었다.
그 사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다른 편 막사에
누워 있다.
어쩌면 겨우 몇 백 야드 혹은 몇 천 야드에
불과한 거리에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 아내였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p.120-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느 날 저녁
멀리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었다.
아내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던 시간,
그는 철조망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떠올린다.
굶주림도, 추위도, 죽음의 공포도 그 순간만큼은
음악 뒤로 물러난다.
그에게 남아 있던 것은 상황을 바꿀 힘이 아니라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태도였다.
그를 살게 한 것은 현실보다 그 현실을 대하는
마음의 방향이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가벼워진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니다.
오늘의 무게를 오늘 안에서 감당했다는 감각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말하는 삶의 태도는
거창한 의미를 붙이는 일이 아니다.
도망칠 수 없는 조건 앞에서도 사랑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선택,
그 작은 자유를 하루에 한 번씩 지켜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