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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결 Dec 28. 2024

제1화 - 한밤의 드릴링

한 밤의 드릴링과 HBCC 대작전

내가 석사 1년 차일 때 연구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졸업을 위해 밤낮없이 쇳가루와 씨름한 이준수. 그의 임무는 교수님이 던져준 미션, HBCC(Hierarchical Body-Centered Cube) 시스템 제작이었다. 컴퓨터 다섯대를 네트워크로 연결한 병렬 컴퓨터 시스템이었다. 멋진 이름과는 달리, 이 시스템은 병렬 하이퍼큐브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온갖 고생과 눈물로 빚어낸 작품이었다. 

(앞으로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19인치 랙에 맞는 컴퓨터 하우징 제작!

"예? 직접 만들라고요? 하우징까지요?!"
교수님의 말에 이군의 얼굴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여유롭게 한마디 던지셨다.
"졸업 논문이라고? 하우징부터 완성하고 얘기하지!"


통상 19인치 랙에 랙마운트 서버를 부착한 사진을 많이 보았을 텐데, 당시 서버 제품은 가격이 비쌌고, 일반적인 PC 여러 대를 붙여서 병렬 컴퓨터를 만들려고 하는데, PC를 랙에 올려놓으면 모양도 좋지 않고, 이동할 때 불안하기도 하니, 직접 랙에 꽂을 수 있는 PC의 하우징을 만들어서, 서버처럼 꽂을 수 있게 만들라는 것이 교수님의 지시였다.


결국 2년 차 이준수와 1년 차 이중고는 부산 전역을 뒤집으며 자재를 구하러 나섰다. 서면 상가, 토성동 복개천까지 누비며 알루미늄 강판과 알루미늄 봉을 샀다. 

두 사람이 지하철에서 알루미늄 판을 들고 오던 날, 어린 아이들의 눈빛이 참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저 형아들 뭐야? 로봇 만드는 거야?"
물론 그들의 시선보다 더 부담스러운 건 쏟아지는 땀이었다.


연구실의 밤을 채운 줄질과 드릴링

이 업무는 오토캐드에서 시작되었다. 하우징의 3D 디자인을 오토캐드로 하고, 종이에 출력한 후 제작에 들어갔다. 교수님은 꼼꼼하게 나사까지 지정해 주셨다.

"해리컬 나사를 쓰도록 하게"

"해리컬 나사? 머리가 삼각형인 나사? 그런 걸 왜 쓰는 거야!"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직접 나사 구멍과 나사산(inner thread, 나사 구멍 내부에 형성된 나선형의 홈)까지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드릴링, 줄질, 나사산을 직접 만들면서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시작됐다.


309호 실습실, 한밤의 굉음

먼저 학교의 공대부속 공장에서 알루미늄 강판 절단을 했다. 그리고 설계도에 맞게 꺾었다.

그리고 수작업이 이루어졌고, 밤이면 밤마다 309호 실습실에서는 줄질과 쇠를 자르는 그라인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바로 옆의 GA Lab. 에겐 참기 힘든 큰 소음이었다.

급기야 GA Lab. 사람들이 참다못해 찾아와 외쳤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차라리 우리도 도와줄게!"


이준수와 이중고는 작은 드릴 비트로 구멍을 내고, 나사 탭으로 수동으로 나사산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했다. 

알루미늄 강판은 휘지 않도록 알루미늄 지지봉을 절단하여 받힘목을 넣었고, 잘린 강판에 운용자의 손이 다치지 않게 강판의 모든 모서리를 줄로 잘린 부분을 곡선으로 하나 하나 갈아내는 작업까지 이어졌다.

이 작업에는 1년 차들이 모두 투입되었다.


쇳가루가 날리는 실습실에서 이군은 방진 마스크 하나 없이 이런 "노가다"로 밤을 보냈다. 

동이 터올 무렵 창문 너머로 빛이 들어오면, 그는 바지에 붙은 쇳가루를 툭툭 털며 하루를 마감했다.
"이게... 전산학과 석사 졸업의 길인가?"


엄마의 무언의 시선

이준수는 평일에는 집에 가지 못하고 연구실에서 숙식하며 일을 했고, 주말에 빨래를 하러 집에 한 번씩 갔다.

주말에 집에 가면, 어머니는 이준수 군의 쇳가루가 잔뜩 묻은 바지를 보며 한숨을 쉬셨다.
"컴퓨터 공부하러 학교 간다더니 이게 뭐야?"
하지만 이군은 어머니의 눈빛에 말을 잃을 뿐이었다.


HBCC, 그리고 새로운 전설의 시작

몇 주간의 밤샘 작업 끝에 HBCC는 완성되었다. 이군은 기쁨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며 박사 과정의 황지영에게 HBCC를 넘겼다. 그런데 황지영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선배님, 졸업 기념으로 이거 가져가시는 게 어때요?"


교수님은 이것으로 병렬 처리 연구를 더 시킬 생각이었지만, 황지영은 교수님의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로 자신이 맡아서 할 미래를 무서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HBCC는 그렇게 또 다른 연구자로 이어지며 연구실의 전설로 남았다.


끝맺으며

HBCC 제작은 단순히 연구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줄질로 손끝에 굳은 살이 생기고, 쇳가루가 날리는 작업 속에서 전자계산학과 이준수와 이중고는 졸업이라는 목표를 향해 도전을 이어갔다.

당시 졸업할 때까지 가끔씩 보였던 309호 실습실의 쇳가루들은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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