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9형제 중 막내로, 맏형은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았다. 대구 근교에서 크게 농사를 짓는 부농 집안이었는데, 맏형은 농장을 운영하며 시골에 사셨는데 두 아들(내 친구의 조카들)을 교육하기 위해 대구 시내에 따로 집을 마련해 내 친구를 지내게 했다.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 말이 조카지, 거의 학교 후배 같은 관계였다.
1980년대 당시에는 형제가 많은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홉 명은 드물었다. 친구는 나이 차이가 적어도 삼촌 노릇을 톡톡히 했다. 조카들의 행실 과 성적 관리를 엄격히 했는데, 아마도 큰형의 특별 당부가 있었던 듯하다.
형제가 많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았다. 여름방학이면 바쁜 형들을 대신해 당연한 듯 예비군 훈련을 도맡아 불만 없이 나갔다. "이번 주엔 셋째 형, 다음 주엔 다섯째 형"이라며 스케줄을 짜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절 대학생들은 교련 수업을 주 4시간씩 받았기에 예비군 훈련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농번기라면 동원 예비군도 대신 나갈 판이었다. (물론 40여 년 전 이야기니 오해 없길 바란다. 공소시효 끝났다.)
또 한 형은 해병대에 지원해 입대했는데, 2주가 지나서야 부모님이 아셨을 정도였다. "여덟째 어디 갔노? 밥 안 먹으러 오나?" "저번 달에 군대 갔는데요." "아~"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모님이 자식들 이름이나 다 아셨을까, 농담하곤 했다.
우리 집은 4남매다. 아들 둘, 딸 둘. 이웃 사람들은 외로운 집안이라고 했다. 그 시절, 평균 다섯 명의 자녀는 흔했지만, 지금은 하나나 둘이 일반적이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아이들도 달라졌다. 형들의 예비군 훈련을 대신 나가고, 조용히 군대에 가던 시절의 아이들과 오늘날 금이야 옥이야 보살핌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같을 수는 없다.
강인함은 내려놓음(下心)에서 나온다. 공동체의 일부로 성장하며 강인했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오늘날은 또래 집단을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고립된 아이들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
아이들은 형제, 친구 등 또래 집단에서 어른이 된다. 덩치 크고 나이만 먹은 사회성 부족한 아이들을 어쩔 것인가. 이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