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활동을 하면서 가장 가기 싫은 곳이 거래가 없는 곳이다.
모든 거래처는 거래가 있는 담당자만 만나려고 한다.
거래가 없는 회사의 담당자는 잡상인 취급을 받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남의 집 귀한 자식인데 잡상인 취급을 받고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을 부모가 본다고 상상해 보라.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된 거래처를 물려받지 못한 내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온종일 "비" 거래처만 방문해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고통이, 인내심이 몸에 배도록 훈련을 한 셈이니까.
남들에게 없는 DNA를 갖게 되었으니까.
매일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저절로 수치심 따위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신규개척에 있어서 수치심도 수치심이지만 인내심과 참을성도 있어야 한다.
끈질긴 시도가 있어야 신규개척도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 번 방문해야 염원하던 사업자등록증 사본을 얻을 수 있다.
물론 1년 365일 돌아다니다 보면 단 한 번의 방문에 이루어지는 신규도 있다.
이건 큰 행운이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넓은 해수욕장에서 금반지를 줍는 확률에 불과하다.
그런 날은 동료에게 술을 사야 한다.
또한 그렇게 얻어진 거래처는 오래 가지도 않는다.
일을 하면서 항상 그런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만나고 거절당하고, 여러 번 시도 끝에 이루어지는 신규가 진짜 신규다.
-----
구파발에 규모가 제법 큰 거래처가 있었다.
원장님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의약품 구매 권한이 전적으로 원장님께 있었는데 간호사, 원무부장 등 장벽이 많았다.
수차례 방문했으나 번번이 면담을 거절당했다.
이른바 “문전박대.”
그래도 간혹, 타사 담당자는 만나는 것 같았는데 나만 유독 만나주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몇 해 전까지 많은 거래가 있었던 흔적은 많은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래가 정리되고 거의 1년 이상 비 거래처로 남아 있었다.
선배들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하고 거래처에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매일 방문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도 갔다.
들리는 소문은 절망적이었다.
제약사와는 거래를 하지 않고 도매업체하고만 거래한다고 했다.
기회는 더 줄어들었다.
직거래를 하지 않고 우회 거래만 한다는 뜻은,
의약품 마진을 포기하겠다는 뜻인데
그렇게까지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인데 나는 그걸 모른다.
제약사 거래가 하나도 없다...
내가 뚫어내면 1호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자.’
선배들은 그만 포기하라고 했다.
그럴 시간에 다른 곳을 더 가란다.
그래도 갔다. 오전에 가고, 오후에 또 가고.
한 100번쯤 갔나...
그러던 어느 날 원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온몸에 전기가 자르르 왔다.
‘이 맛에 신규 한다!’
원장님은 굉장히 과묵한 분이셨다.
열심히 제품을 소개하는 내 말을 단 한 말씀도 없이 듣기만 하셨다.
그렇게 5분쯤 흘렀나...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내가 나가 있는 동안 모든 간호사와 직원들을 불러들이셨다.
또 한참 시간이 흐르고,
엄청난 주문이 쏟아졌다.
잭팟이 터진 것이다. A급 거래처 하나가 생겼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원장님이 제약사를 배척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오래전 우리 회사 담당자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명예가 걸려있어서 차마 구체적인 이유는 밝힐 수가 없지만
원장님과 병원에 많은 폐를 끼치고 업계를 떠나버린 파렴치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큰 충격을 받으신 원장님은 마진을 포기하면서까지 모든 제약사를 기피해 버린 것이다.
선배들도 모두 쉬쉬하고 있는 가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만 가로로 뛰고 세로로 뛰어서 결과를 내어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전후 사정을 알았다면 과연 시도나 했을까.
어쨌든 진심으로 두드리면 열린다는 평범하지만 큰 교훈을 얻음과 동시에
서울의 끝, 구파발에 나의 커~~다란 깃발을 하나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