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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친구 JS(1)

by 신화창조
바보들의 행진.jpg

고등학교, 대학교를 함께 다닌 한 친구가 있다.

전공도 나와 같다.

별다른 계기는 없었지만, 학교 때 유별나게 붙어 다녔었다.

왜 그랬을까, 유추해 보면 성적도 비슷했고, 가난한 환경이 닮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런 애가 어디 그뿐일까. 아무튼, 우리는 이유 없이 잘 붙어 다녔다.


그 친구는 시골 출신이었다.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여러 형제 중 하나로 늘 등록금 걱정을 안고 살았다.

당시엔 학자금 융자나 장학금 제도가 지금보다 열악해 학비 마련이 쉽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자리도 별로 없었다.

막노동을 하거나, 과외를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과외는 자리는 턱없이 부족했고, 막노동은 다치기 일쑤였다.

그저 매 학기 아슬아슬, 겨우겨우 등록금을 내고 학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2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한 건 당연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입대하고 편지가 왔다.

처음에는 대구 군의학교에서 위생병 교육을 받고 있다고 좋아했다.

학교 때는 그렇게 힘들더니 군대 복은 좀 있는 모양이라고.

얼마후 다시 편지가 왔다. 공수부대에서.

위생병이 되긴 했는데 지지리 복도 없어서 공수부대 위생병이 되었단다.

그래도 위생병은 좀 낫지 않냐고 했더니,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등,

훈련은 똑같고 위생병 가방만 하나 더 어깨에 멜 뿐이란다.

그렇게 그의 고단한 군대 생활이 계속되는 순간, 나도 입대를 하게 되었다.


입대를 며칠 앞두고 매일 같이 이어지는 송별회 탓에

귀가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집에 오니까 어머니께서 초저녁에 공수 베레모를 쓴 친구가 찾아 왔다고 했다.

아무리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해도 한사코 다시 오겠다고 하더란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그 친구가 찾아 왔다.

첫 휴가를 나왔는데 우리 집에 전화를 했더니 내가 입대를 한다고 해서

제집에도 안 가고 바로 우리 집으로 왔단다.

폐를 끼칠까 봐 여관에서 자고 바로 왔다고 했다.


그런 친구였다.


아침을 같이 먹고 나를 데리고 이발소로 가서 머리를 깎게 하는 등,

나름대로 입대준비를 도와줬다.

입대 전날 그 친구가 참석한 마지막 회식을 하고 다음 날 영천역에서 입대를 했다.


당시는 역사 앞 광장에서 일행과 헤어져야 했다.

역사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군대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같은 로맨틱한 이별은 70년대에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이고

80년대엔 어림없었다.


아무튼, 소중한 첫 휴가의 많은 날을 기꺼이 나를 위해 내어준 친구가 있었다.


한참 후 나도 첫 휴가를 나와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인데,

패기의 공수부대 일병님께서 영천역 마당에서

친구를 따라 역사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헌병들과 몸싸움을 동반한 소동을 벌여,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아들 친구가 영창을 갈까 봐

전전긍긍 겨우 말려서 데리고 왔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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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하고 열 달 만에 첫 휴가를 나왔는데

갑작스러운 친구의 입대 소식에 만사를 제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친구는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친구 없다.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던 모습,

헌병과 싸우던 모습, 보기 좋더구나. 꼭 보답하고 오래오래 사귀어라.”


이야기가 길어진다. 아무래도 둘로 나눠야겠다.


다음 편에서 따듯한 우리의 이야기를 더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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