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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동기, 내 친구 태호

by 신화창조
태호.jpg

1986년 11명이 함께 입사했다.

전국방방곡곡 출신들이 다 모였다.

그중에서 몇몇은 서울 친구들이었다.


함께 입사한 처지지만 직장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달랐다.

대체로 지방 친구들은 절박했으나 서울 친구들은 열심히는 하지만,

‘아니면 말고’하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아보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여기가 힘들면 다른 곳을 찾아보겠다....

거기에 반해 지방 친구들은 꼭 이곳이어야 한다는 듯 매달렸다.


서울 친구들 중에 “태호”가 있었다.

재수를 해서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과제도 대충대충 하곤 했다.

성적도 늘 시원치 않아 강사들에게 싫은 소리 듣기 일쑤였다.

지방에서 올라와 매사 악착같았던 우리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그래도 결코 낙제를 하는 법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준은 통과했다.


학생 대표였던 나로서는 11명이 낙오 없이 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입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 기본적인 수준은 유지해야 했다.

자주 저녁 술자리 미팅을 했다.


“얘들아, 조금만 공부하자.....”


그렇게 동기 모두 낙오 없이 함께 교육을 이수했다.

후에 들은 얘기로 전원 졸업한 동기는 없었단다. 참 다행이었다.


태호는 보통 키에 100kg이 넘는 애였다.

장충동 부잣집 막내여서 그런지 착하긴 하나 진지함은 조금도 없는 친구였다.

농담과 유머를 좋아하고 심각한 일이라면 질색이었다.

혹시 그런 일이 생길 기색이라도 보이면 피하기 바빴다.


교육 기간 내내 친하게 지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남에게 해 끼칠 줄 모르는 인간미가 좋았다.

부서배치도 바로 옆 사무실이라 매일 만날 수 있었고,

힘들 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집에 못가는 연휴라도 걸리면 혼자 심심해할 친구를 배려해 장충동 집에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기도 했다.

어쩌면 고달픈 서울 살이 피난처가 되어준 고마운 친구였다.


태호는 현장 영업 일을 힘들어 했다. 나처럼 많이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자동차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대체로 부장님 정도는 되어야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그런 규정은 없었지만 불문율이었다.

그 이하 직원은 다른 곳에 세우고 걸어서 회사에 나와야 했다.

우리 같은 사원이, 집이 부자라서 차가 있다면 집에 고이 모셔두던지, 아주 멀찌감치 숨겨놓고 아닌 척 하고 걸어와야 했다.

혹시라도 들키면 버릇없다고 뒷말을 엄청 들어야 했다.


태호는 부모님을 졸라 차를 사 가지고 출근했다.

회사 옆 동네 골목에 자동차를 숨기고 둥글둥글 굴러 출근하는 태호.


“자동차 없으면 난 회사 못 다녀! 난 크잖아.”

지금도 눈에 선하다.


태호는 대리 때 회사를 그만 두었다.

당시 영업본부장이 태호의 아킬레스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뚱뚱하다며 직원들 앞에 세워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태호를 맹비난을 했기 때문이었다.


태호는 다른 친구들과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신체 구조상 많은 곳을 방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형 거래를 잘 유도했다.

지역도 경기도 변방지역이라 개업처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기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신체적 핸디캡을 건드려버렸으니 젊은 우리 눈에도 그 본부장은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


덩치 큰 친구들 중에서도 슈퍼맨은 그 이후에도 많이 나왔다.

좋은 리더라면 각자 개성에 맞는 영업 방식을 개발하게 도와주고 성과를 유도해야 한다.


92년인가 태호가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우리는 친구 관계를 이어갔지만 늘 아쉬웠다.

선이 굵고 자기에 맞는 대기만성 형 영업을 하는 친구였는데.

어쩌면 제약업계의 또 다른 용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누군가 그 싹을 잘라버렸다.


그는 늘 유쾌했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친구의 가능성을 꺾어버린 일이 지금도 마음에 남는다.

33년 전 리더십의 한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쁜 상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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