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어느 나라 문장이든, 詩든,
그 나라 글과 말로 감상해야 그 고유한 본질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좋은 중국의 古詩를 공들여 번역해 봐도 한자 자체의 느낌을 다 살리기는 힘들다.
중국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 하나를 번역해 보자.
한거소린병 閑居少隣竝
초경입황원 草徑入荒園
조숙지변수 鳥宿池邊樹
승고월하문 僧敲月下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엄격한 격식에 빈틈없이 들어맞는 그림 같은 한시다.
눈을 감고 읊조리면 한적한 풍경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느낌 좋은 명시다.
이제 우리 말로 번역해 보자.
이웃 드문 동네 한적한 집,
풀길 지나 거친 정원 들어서면
연못가 나무엔 새들이 잠들고
스님은 달 아래서 문 두드리네.
어떤가.
목마른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달고 짠 음식 잔뜩 먹고 물 한 모금 못 마셨을 때,
그런 느낌이다. 마땅치 않다.
아무리 단어를 이것저것 바꿔 끼워도 원작의 느낌이 살지 않는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문학은 제집 문화로 소화해야 제대로 산다.
어디, 나라와 나라 사이만 그럴까.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래 퇴고推敲에 관해 글을 쓰고 싶어서 그 근원을 찾다가 이 시를 만났다.
그러다가 원래 목적을 잊어버리고 원작 감상에 빠져버렸다.
일거에 샛길로 새버린 자신이 한심하다.
세상에,
글 쓰는 자가 글을 쓰다 말고 길을 잃고 희희낙락하다니.
허나,
시 속에서 집주인도 되어보고, 스님도 되어보고, 새의 처지도 되었으니 이것도 괜찮다.
구구한 변명은 그만두고 잘 그려진 동양화 속에서 그냥 헤매버리자.
퇴고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겠다.
오늘은 모든 걸 내려놓고
온종일 시나 외우며 늘어져 버릴래.
그 안에서 스님이든, 새든, 집주인이든, 무엇이든 되어볼래.
자유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