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할 거 없어.

술 좋아하는 철딱서니 없는 아빠를 딸은 이해해준다.

by 로맨티킴

"미안해할 거 없어."


잠을 자려고 누웠다. "아빠가 또 술 먹느라고 늦게 왔네. 미안해" 딸을 꼭 껴안아 줬다. 딸은 언제나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미안해할 거 없어" 어린아이가 이 말을 할 때마다 가슴 한편이 아리다. 아빠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걸까. 어른의 고달픈 인생을 아는 걸까. 술을 좋아하는 아빠를 이해해 준 말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다.


할아버지가 여행을 다녀와서 뒤풀이에 초대했다. 아이들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모부는 술친구자 인생 선배님이시다. 삼겹살 파티를 한다. 여행의 묘미는 뒤풀이고, 삼겹살에 소주를 함께 마셨다. 지글거리는 고기 냄새로 온통 범벅된 방엔 도열한 소주병은 악기처럼 보인다. 고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기 먹자고 하지 않는다. '뜨드득' 병뚜껑 따는 소리, '조르륵' 술 따르는 소리, '지지지직' 김치 타는 냄새, 바쁘게 움직이는 젓가락 따위 소리가 파티를 만들어준다. 술자리를 즐긴다는 말은 가만히 사람과 음식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런 날 비까지 온다면 소주는 와인이 되고, 나 역시 우아해진다. 소주와 삼겹살을 끊지 못하겠다.



"집에 가자고 몇 번을 얘기하는데도 일어나지 않네요. 참 엉덩이가 무거워요." 아내는 술자리만 가지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엉덩이에 살쪄서 그렇다고 가끔 발악해보지만 세 명의 싸늘한 눈빛만 돌아온다. " 아빠 빨리 가자"라고 정확히 몇 번 말한 줄 아냐고 묻는데 '딱 한 번'이라고 얼큰히 취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짜증이 올라와 불그락 거리며 아내는 숨어있는 친구를 불러낸다. 매번 헐크로 변하는 아내를 만나야만 엉덩이를 떼는 것 같다.


누구보다 난 술의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사실 빨리 마시는 건 약간 취한 상태로 집에 가고 싶어서다. 아이들이 보챌 땐 더 빠르다. 한 병, 두 병, 세 병, 취할수록 집에 가는 시간이 빨라진다. 술자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가끔 중심에서 벗어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잔을 부딪치면 주제로 돌아오는 게 신기하다. "박수 세 번 시작 짝짝짝" 손뼉을 치고 나면 조용히 날 바라보듯이 잔을 부딪치는 건 집중을 위함이다. 쓸데없는 이야기에 빠져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수시로 부딪혀줘야 한다. 술은 먹고 싶고 아이들은 집에 가자고 하니깐 나름 방법을 찾았다. 빨리 마시는 것이다. 너 한 잔, 나 두 잔.



할아버지랑 술을 마실 땐 먼저 집에 가라고 말하면 끝끝내 아빠랑 같이 가야 한다고 버틴다. 가라고 부탁하고 애원해도 소용없다. 아들은 아빠 옆에 앉아서 '집에 가자'라고 돌부처가 되어있다. 감성에 젖고 싶은데 아이들의 귀가 요청은 끊임없다. 집에 가고 싶은 아이들과 집에 가기 싫은 아빠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한 사람 때문에 "가자" "5분만" "이거 한 병만" 곧 간다는 메시지를 계속 만들어 낸다. 딸도 이제 끝이라는 안도를 주면서까지 술을 마시는 아빠를 본다. 엄마랑 같은 맘으로 바라볼까? '어이구, 아빠 엉덩이가 무겁네요.'


아이들이 아빠를 붙잡고 모임, 친구, 운동을 하러 못 가게 할 때면 아내는 "아빠도 쉬어야지" "아빠도 친구들 만나야지" "아빠도 운동해야지" 늘 배려하는 말을 해주었다. 이임숙 작가는 아이의 언어는 엄마에게서 온다. 아이가 배운 건강한 언어는 건강한 마음을 갖게 한다. 긍정적 언어를 많이 접한 아이는 긍정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 부정적 언어를 자주 접한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 거나 분노한다. <상처 주는 것도 습관이다.>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딸은 감정을 조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랑 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엄마의 말을 배우고 따라 하고 있었다. 엄마랑 어떤 대화를 했을까. 뭘 배우게 됐을까. 딸은 위로하는 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상대를 배려해 줌으로써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되는 걸 알아가고 있다. 엄마의 정신까지 닮아가는 것 같다.


아빠는 오늘도 술 마셨다고 혼내지 않는다. 괜찮다며 토닥여주는 게 영락없는 엄마의 모습이 나온다. "아빠가 술 먹는다고 집에 또 늦게 와서 미안해" 술에 취해 몇 번을 안아 주었다. 괜찮단다. "아빠도 쉬어야지. 스트레스 풀어야 식당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지" 깜짝 놀랐다. 딸의 입에서 엄마의 말이 나왔다. 아내가 말하는 건가? 술 취해서 내가 잘못 들었나?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아내는 이미 잠이 들었다.


과연 어디까지 내 맘을 들여다본 걸까? 왜 미안해하지 말라고 할까 오히려 궁금하다. 아빠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말이다. 술을 좋아하는 아빠를 이해하는 한마디. "미안해할 거 없어"라고 말해주는데 왜 난 고맙게 느껴지는지. 철딱서니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빡빡이 삼촌 연락 안 됐어? 장난감 사준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