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행동보다 빨라서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이번에도 그랬다. 가만 놔둬도 잘 타는 장작더미를 들쑤신 꼴이 돼버렸다. 확실하지 않으면 패를 보여주면 안 되는 데 온종일 들들 볶이다가 결국은 마트로 향했다. 어제 기분 좋게 산타 삼촌이 되겠다고 했던 선배는 연락이 두절돼버렸다. 20만 원을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받아왔어야 했는데 결국은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버렸다. 공연한 약속을 해서 쓸데없는 지출을 한 셈이다. 아이들이 장난감 살 때는 생일만 허락되는 줄 알고 있는데 사례를 만든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골프 모임에 갔다. 아이들이 '빡빡이 삼촌'이라 부르는 선배를 좋아하고 잘 따른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선배의 소주잔을 드는 속도가 빠르길래 "무슨 좋은 일 있으셔요?" 소주를 따라 주며 물어봤다. 사업이 잘되어서 기분이 좋다며 써서 잘 마시지 않는 술을 달짝지근하게 넘기신다. 사업 결과를 꼼꼼하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가게를 오픈하면서 일으켰던 대출을 다 갚았다고 법무사 거래명세를 보여주셨다. '아~ 이런 불황에 배가 아팠다' 속내와 다르게 잘 됐다고 축하했더니 내일 조카들 데리고 연락하란다. 혹시라도 취기에 그런 게 아닌지 재차 확인하고 약속을 받았다. "형님 아내에게 말해도 되죠? " 빡빡이 삼촌이 장난감 사준다고 내일은 시간 비워두라고 문자를 보냈다. 내일을 기다릴 아이들 얼굴과 장난감을 품에 안은 모습이 교차하면서 흐뭇해졌다. 요놈들은 오늘 밤이 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닐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빡빡이 삼촌이 장난감 사준다고 했지?" 아들 녀석이 아빠 안부보다 삼촌을 먼저 찾는다. 어젯밤 다짐을 하고 다짐을 할 때마다 선물을 사줄 삼촌은 산타할아버지보다 멋진 사람이 되어갔다. 아침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왜 아직도 아침이 안 오냐고 잠들기 전까지 말했던 아들이었다. 내일 팬타스톰 시리즈 완성체를 갖게 된다는 설렘과 함께 잠들었다.
삼촌 어딨어? 삼촌 연락해봐
"삼촌이 사준다고 했지?" 녹음기를 틀어 놓았는지 쉬지 않는다. 딸도 "삼촌 연락 안 됐어?" 메아리를 만들어 낸다. 둘이 경쟁이라도 하는지 번갈아 가면서 아빠를 전략적으로 몰아갔다. 삼촌이라고 한 번 부를 때마다 쨉이 아니라 묵직한 어퍼컷이 한 방씩 들어오는 것 같았다. 워낙 잦은 쨉을 허용했는지 내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삼촌 소리만 들어도 성질이 나기 시작할때쯤 "아빠가 사줄게 " 말하고 싶었다. 참고 참는 건 내가 술을 안 마시겠다고 약속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점심을 할머니가 보내주신 대게를 발라주었는데도 맛이 없다고 먹질 않는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못 받은 어린이처럼 심통이 제대로 났다. 이상했다. 카톡만 보냈지 애들한테 난 말하지 않은 것 같다. 모임이 끝나고 바로 글쓰기 온라인 모임으로 이어졌다. 아이들과 접촉했던 시간이 짧은 데 언제 내 입이 촐싹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범인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엄마한테 빡빡이 삼촌한테 전화하라고 해봐" 아이들의 시선을 엄마로 돌렸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고 장모님이 보내주신 대게가 세상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귀가 아프지 않고,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게 되니 일요일의 따뜻한 오후를 즐길 여유까지 생겼다. 소파와 일심동체가 되었고 잠깐 잠이 들었다.
빨리 일어나라며 아들이 깨운다. 어수선했던 오전과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내는 빨래를 널며 "아이들과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죠." 짧은 한마디에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서 온종일 볶인 상황이 원망스러웠구나. 착착 빨래를 털어내는 소리가 귀싸대기를 때리는 소리처럼 들리는 건 잠이 덜 깨서 그런 거겠지.
목적지를 알고 있는 아이들은 민첩하게 움직인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엄마를 기다리는 여유까지 부린다. 채비를 끝낸 아이들을 보고 감을 잡았다. '엄마가 사준다고 했구나' 오전에 "빡빡이 삼촌이 안 사주면 엄마나 아빠가 먼저 사주면 되잖아" 말하더니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약속을 지킨 삼촌으로 만들어주려고 한 것이다.
왜 확실하지 않은 약속을 해서 아침부터 아이들 애간장을 태웠을까. 아내는 삼촌을 지켜줬다. 누가 사준 줄 뻔히 알 텐데도 삼촌 만나면 고맙다고 꼭 인사하라며 선물을 주었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던 타짜 영화가 생각난다. 술자리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더니 교훈으로 삼아야겠다. 선배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고, 숙취 때문에 조카들과 약속이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며 아내를 달랬다. 돌아오는 차 안의 분위기는 온기와 한기가 같이 느껴졌다.
<아이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이다> 탈무드에 나온다. 배운 게 많은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