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안 받아"
한참 후 파산했다며 파산관리 변호사에게서 청구장이 날아왔다. 미지급한 물품대금을 받겠단다. 소명할 기회를 준다며 서류들도 함께 왔다. 어이가 없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생각했었다.
유통 전문업체 '동해'(가명)에서 먼저 영업전화가 왔었다. 기존 거래하던 곳 하고 약간 문제가 있었던 시기에 전화라 성의 있게 전화를 받았다. 먼저 물어봤던 것이 " 기본 몇 박스씩 배송해주나요?"였다. 기존 업체는 어찌나 짱짱하게 구는지 기본 200박스 이상씩 주문을 해달라고 했다. 그때 당시 박스당 5만 원 정도였으니 천만 원이라는 돈의 무게를 감당하기 벅찼다. '작은 가게 수 십 개보다 큰 가게 몇 개가 낫다'는 경영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업체였다.
주도권을 쥔 유통에 끌려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 다른 곳을 알아보고 영업도 많이 왔는데 품질에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어떤 업체는 샘플로 몇 박스만 보내달라고 하면 내가 공짜로 샘플만 쓰고 거래를 트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샘플조차도 보내지 않는다. 이럴 땐 시장에는 나쁜 사장들이 많구나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동해랑은 전화 한 통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래가 시작되었다. 왜 그랬을까 싶다. 깐깐하게 업체를 선정하고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난 귀신에 홀린 듯 동해랑 거래처가 되었다. 인연은 쉽다. 끊을 때가 문제지.
추석이나 설 연휴에는 다른 거래처는 몰라도 동해엔 명절 선물을 챙겨서 보냈다. 물품을 받는 쪽이 선물을 받는 게 보통이었으나 반대로 난 직원 수에 맞게 지역 특산품인 김, 소곡주, 박대 등을 챙겨주었다. 처음 선물을 챙겼을 때 사장님이 직접 전화가 왔었다. "고마워요. 지금까지 수 십 년을 운영했지만 직원들에게 명절 선물을 챙겨준 거래처는 없었어요"
거래처는 내 장사의 돈을 벌어주는 동반자로 생각하기에 늘 작지만 마음을 담아 성의 표시를 했다. 손님 다음으로 직원과 거래처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들 이야기는 직원과 거래처의 입을 통해 나가기 때문에 늘 진심으로 대하려 노력했다. 가족처럼 일 할 사람을 구한다는 말은 사실 우리 영업장에 헌신하라는 다른 말처럼 들려서 난 그 말에 거부감이 든다. 자영업자들은 직원을 가족처럼 대한다는 명분으로 요구하는 게 너무 많다. 그냥 직원도 손님처럼 대하는 게 서로 간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고 직원도 일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해와의 추억은 늘 함께 물건을 냉동창고에 옮기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사는 얘기를 할 때였다. 식사하고 가시라고 해도 밥은 휴게소에서 먹었다며 대신 커피를 마셨다. 송 부장, 김 과장과 마셨던 커피는 내가 지금까지 마신 커피보다 많다. 우린 제법 친해졌고, 소소한 취미생활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떤 때는 김 과장에게 할 말이 있는데 송 부장이 오면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가게에서 장사할 물건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렸다.
몇 해를 믿고 좋은 사이로 거래를 했다. 원산지에서 물건 양이 부족해 원가가 치솟을 때도 동해는 어렵게 싼 물건을 구해서 먼저 연락을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 이래서 사람이 중요하구나' 감동을 했었다.
장사나 사업을 하다 보면 힘들 때가 있다. 갑자가 결제방식을 바꿔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거래처가 카드로 결제하기 시작하면 망하기 바로 전이다고 귀띔해주었던 김 과장이 현금 일시불로 해달라고 한다. 회전 결제로 배송 전까지 잘 입금하지 않았느냐? 외상 한 번없이 거래했는데 갑자기 일시불 결제해달라고 하면 우리도 어렵다고 반대로 내가 사정을 하기 시작했지만 어렵게 돈을 구해서 결제를 해주었다.
이제는 선입금을 해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몰랐다. 동해가 왜 그럴까 생각만 했지 상황이 어려워졌으리라고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현금이 없어서 수입을 못하고 거래처 미수금은 회수되지 않고 악순환에 들어선 것이다. 선입금한 돈으로 다른 곳 물건을 돌려서 보냈던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는 횟수가 늘어났다. 당연히 물건이 내려오지 않는다. 귀띔이라도 해주지. 돌이켜 보면 김 과장이 메시지를 주었던 것이다. '카드결제 하기 시작하면 망하기 전'이라는 말을 우리는 망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동해의 직원이지만 그간 마셨던 커피의 정 때문에 귀띔해줬고 난 못 알아들었다. 인연이었다고 말이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도 되지 않는 순간까지 왔을 때도 난 기다렸다. 인연이란 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법인을 바꿔서 서울 경기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운영하려고 한다는 말도 믿었다.
편지를 받고서야 알게 되었다. 파산했다는 것을. 물건 박스를 같이 나르던 김 과장도, 커피를 함께 마셨던 송 부장도 이제는 동해 직원이 아닌 것이다. 회사의 파산보다 전화를 받지 않던 그들에게 서운하다.
커피 한잔이었지만
우린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동해의 직원이 아닌 삶에서 만난 친구라고 생각했다.
끝이었다면 안녕이라고 인사라도 해주고 가지 서운하다.
그들도 끝내는 법을 몰랐을 것이다.
인연은 쉬울 수 있어도 끝은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