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 본 Oct 26. 2020

멈춰야 보인다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시간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겪은 경험들이 나의 성장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연을 벗하며 지낸 시간들은 두고두고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런 시골생활이 나에게 큰 감사거리이다.


환경뿐 아니라 내 주변 사람 역시 나를 변화시켜왔다. 나의 아버지는 자상하셨고 부드러웠다. 다른 집 아버지들과 달리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뚝뚝하고 거칠지도 않았다. 트로트 가요를 구성지게 그리고 구슬프게 잘 부르셨다. 아버지의 흥얼흥얼 노랫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노래 부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부지런한 분이셨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더위에도 농사일을 열심히 하셨다. 

"아버지. 더운데 좀 쉬면서 하세요."

"아녀. 해지기 전에 얼른 다 해야지 그래야 내일 할 일을 준비할 수 있지."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있듯이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도 있다. 무슨 질병처럼 농한기가 되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돼버렸다. 농한기가 지나고 나면 아버지의 노름빚이 뚝 튀어나왔다. 올해는 그냥 지나가려나 기대해 봤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끊이지 않는 끈질긴 고리처럼 악순환이 계속되어 모든 전답을 팔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결여된 부분을 당신이 책임지면서도 자녀들에게 삶의 소망을 갖도록 노력하셨다. 경제적 어려움이 나에게 현실이기에 아플 때도 많았지만 가장으로써 권위가 상당히 약해진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아버지는 괴팍하거나 엄격하지도 않고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시는 따뜻한 분이신데 왜 그렇게 못된 버릇은 못 고치는 걸까? 의지가 약하신 걸까? 


아버지에게서 찾지 못한 안식처를 그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번 깨진 신뢰는 다시 회복되기 어려웠다. 우리는 잘해보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것은 아닌데 또다시 옥신각신 다투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이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경제적인 능력도 없는데. 그렇게 묻어 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용서가 된 것도 아닌 상태로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진 듯 살다 보니 나는 점점 마른 장작같이 생기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라도 다녀야 했다. 무턱대고 교회라도 열심히 다니다 보면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다. 아들이라도 제대로 키워 보고 싶었다. 아들은 온순하고 순종적이다. 누구보다 엄마를 아끼며 잘 따르는 아들이다. 그런 사랑스러운 아들을 나를 실망시킨 아빠처럼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를 했다. 나도 이번에는 물러 서지 않았다. 그의 반대를 무시하고 나의 불만을 극단적으로 표출하고자 하였다. 믿었던 그에 대한 쌓였던 절망감이 그렇게 드러나자 우리는 다툴 수밖에 없었다. 서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이기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지금은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당시는 그가 사랑할 수 없는 원수처럼 보였다. 교회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했지만.


나는 오직 자녀라도 잘 키워 보고자 하는 신념으로 규칙과 의식을 강조하는 딱딱한 율법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믿음이 부족한 아들에게 끊임없는 강요로 억지로 청소년 수련회를 보내기도 하고 내 판단에 정결하게 보이지 않는 장난감들을 뺏어 버렸다. 가장 민감한 사춘기 시절에 지워지지 않는 많은 상처를 아들에 남기고 말았다. 아들을 통해 나의 세계를 만들려고 고집을 부렸다. 나의 집착이 아이를 아프게 했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집착이었다. 그 한계마저 나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아들이 아빠에게 진술서를 써준 일로 사랑하는 아들과 관계도 깨져버리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는 맘대로 미워할 수 있었다. 아들은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아니 미워지지 않는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인도를 막고 보수 공사하는 모습을 멀리서 볼 때 그곳에는 인도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막상 가까이 가서 보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길이 나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눈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런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 문제에서 자유할 수 있는데 나는 끊임없이 내가 해결하려고 했다. 헤아릴 수 없는 눈물의 밤을 지새우며 안갯속을 걷듯이 막연하게 헛된 것들 부여잡고 안간힘을 써왔다. 어부가 잡은 그물 안에서 탈 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그런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앞만 보고 빠르게 지나가면 안 보이던 것들이 멈춰야 보인다는 것을 몰랐다. 길을 걷다가 멈춰보면 산들산들 바람에 흔들리는 아기 손 같은 풀잎들이 보인다. 그 곁에 들꽃들이 방긋방긋 웃고 있는 것이 보인다. 풀 숲 사이로 기어 다니는 크고 작은 개미들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벌레들이 보인다. 그 위로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나비와 잠자리가 보인다. 잠자리가 내 팔에 날아들었다. 예전 같으면 급하게 쫓아버렸을 텐데 날아갈세라 가만히 숨을 죽이고 내려다보았다. 잠자리가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날아갔다. 깜빡이는 잠자리 눈도 봤다. 그렇게 잠자리를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이다. 내가 옳다고 바라봤던 곳에서 눈을 돌리자 주변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를 봐달라고 노래 부르고 있었다. 생베를 아름답게 물들이기 위해 염연하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그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울고 웃고 견디다 보니 인생을 아름답게 꾸며가는 것이 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가던 길에서 멈춰 설 수 있게 되었다. 내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라는 환경, 남편이라는 환경 그리고 아들이라는 환경 속에 나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 환경 속에 부딪히며 나는 성숙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시골생활이 나의 성장기를 성숙시켰고 소중한 자산이 되었듯이.

내가 추구했던 세계가 막히게 되자 멈춰 서게 되었고 드디어 나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인정하자 진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로소 나를 멈출 수 있게 해 준 그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내가 부딪혀야 했고 다듬어져야 했던 순간들을 함께 견뎌줘서 고맙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빈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