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가 살던 곳에서 퇴거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정들었던 이웃들과 작별하려니 떠오는 사람들이 많다. 일일이 만나 감사의 표현을 다 할 수 없어 이 글로 대신한다. 한파 속에도 햇빛 따뜻한 담벼락에 기대며 쉼을 얻듯이 그들의 사랑을 힘입어 삶의 거친 파도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마구 나온다.
먼저, 앞집 아주머니가 있다. '띵동.'하고 그녀가 무를 넣고 맑은 소고깃국을 끓여 찾아왔다. 수술하고 기운 없을 테니 먹으라면서. 참으로 고마웠다. 그 따뜻한 손길을 어떻게 잊을까! 그가 집을 나가 버리고 4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상선 암 수술을 받았을 때였다. 친정어머니가 병원에서 뒷바라지를 해 주셨지만 계속 당신이 내 곁에 있으면 사위가 설 자리가 없다며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비워 주셨다. 수술 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그를 친정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퇴원할 때 그가 준 카드로 시어머니가 병원비를 냈을 뿐이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딸아이가 콩나물 국과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딸아이가 정성스럽게 차려 놓은 국과 밥이었지만 수술 후 많이 허약해져서 그런지 고기 국이 먹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분의 사랑스러운 보살핌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국을 먹으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딸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고마움을 넘어 가슴이 시리게 아프다. 더 많이 못해줘서 아프고 곁에서 힘이 되어줘서 고맙다. 언젠가 앞이 보이지 않은 터널 같은 절망 속에 내 방에서 목놓아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의 인내의 한계를 실감하며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 감정의 답답함을 주체할 수 없을 때였다. 딸아이는 mp3로 조용히 노래 하나를 켜 놓고 나갔다. [길을 만드시네. 그분이 길을 만드시네. 당신이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길을 만드시네. 당신이 볼 수 없는 길을 만드시네...] 울고 있던 나는 그 가사를 듣자 더 눈물이 났다. 누군가 슬픔을 달래주면 더 눈물이 나는 것처럼 더 크게 엉엉 울고 말았다. 그 가사 하나하나가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속삭이고 있었다. 나만 고통당한다고 생각했고 나만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내 곁엔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실컷 울고 나니 그 노래가 끝날 때쯤에는 감사의 마음으로 바뀌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딸아이는 철없는 엄마보다 더 속이 깊어서 자기도 힘들었을 텐데 큰 불평 없이 엄마의 마음을 읽어주는 아이였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맙다.
가깝게 지내던 언니가 있다. 나를 데리고 마트에 가더니 카트에 쌀 한 포대를 실었다. 그리고는 "너 과일 좋아하지? 요즘, 딸기가 제 맛이더라."라고 하며 카트 가득 과일과 생필품을 사주었다. 사실 과일이 먹고 싶었지만 과일은 그때 나에게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김치와 밥만 차려준 때도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거라도 있는 걸 감사하자. 그래도 김치라도 있잖아." 이렇게 말했던 시절이었다. 이미 관리비도 3개월 이상 내지 못해 경고장을 받았는데 어떻게 과일을 생각할 수 있는가. 나와 갈등 속에 지친 그는 집을 나가 갑자기 생활비까지 주지 않았고 나는 공부방을 하고 있었지만 두 아이와 함께 살기에는 옹색할 때였다. 나의 자존심인지 그들을 염려해서 인지 정확히 단정 지을 수 없었지만 친정식구들에게는 허위단심으로 살아가는 걸 숨기고 싶었다. 그 언니에게 한 번도 내 형편을 말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그때, 그 언니의 포근한 관심으로 잠시나마 무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었다.
내 조카가 있다. 단감 한 상자를 보내왔다. 고단한 삶의 지쳐가던 어느 날, 동네 어느 집 담 넘어 떨어진 감을 주어 먹은 적이 있었다. 어릴 적 생각나서 별생각 없이 입에 넣었는데 내 처지가 그래서 그랬던지 감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그럴 때 삶의 비애를 느끼곤 했다. 그런 기억이 나서 조카가 보내준 감을 보자 와락 눈물이 나고 말았다. 내가 감이 먹고 싶은지 어떻게 알았을까? 그 조카가 이모의 사정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그 일뿐이 아니다. 최근 이혼 소송이 일 년이나 지속되다 보니 입맛도 없어 식사를 잘 못 챙겨 먹고 있던 중 그 조카가 건강 잘 챙기라면서 국거리와 넛트 세트를 보내줬다. 며칠 전부터 대충대충 끼니를 해결했는데 마침 밥을 해 먹으려고 하던 순간에 그 선물이 도착한 것이다. 아하! 어쩌면 이렇게 절묘한 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어쩌면 너는 이리도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그것들은 메말라 가던 내 가슴에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되어 기쁨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 친구가 있다. 내가 푸념을 쏟아 낼 때마다 끝까지 들어주고 같이 아파했던 너. 그녀는 항상 현명하고 바른 충고를 해주었다. 그녀는 속옷가게를 운영한다. 가게 일로 스트레스도 많았을 텐데 자주 식사를 같이 하고 산책도 하면서 위로를 해줬다. 가족은 가까운 사이인데도 마음을 다 털어놓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친구에게 더 속마음을 털어놨던 거 같다. 내가 울 때 같이 울어주고 웃을 때 같이 웃어 준 친구다. 그런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축복이다. 또 얼마 전에 친구가 직접 만든 상품권은 감동의 도가니이었다. 예쁜 글씨로 쓴 문구와 이걸 만들려고 신경 썼던 그녀의 맘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더 감사했다. 마치 장난감 가게에서 무엇이든 사주겠다고 서서 기다리는 아빠를 믿고 장난감을 고르는 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속옷을 이것저것 골라 담고 보니 그 금액의 두배가 되었다. 초과되는 금액은 내가 내려고 했는데 그녀는 그것까지 선물로 주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감이었다.
장날이면 직접 농사지은 야채를 파시는 할머니가 있다. 항상 싱싱한 야채를 깔끔하게 다듬어 오시는 분이다. "내가 죽으려고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 죽어."라고 말씀하시며 농사일에 바쁘신 당신의 사정을 넋두리처럼 쏟아 내시는 정 많으신 분이다. 야채를 살 때마다 늘 덤으로 한 주먹 더 넣어주시는 친정엄마 같은 분이셨다. 한 번은 그분이 새로 한 틀니가 잇몸과 안 맞아서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아파하신 적이 있었다. 친청엄마 같은 생각에 함께 치과에 간 일이 있었다. 내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일로 그 분과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이제 못 뵙겠네요. 저 이사 가요."하고 인사를 드렸다. "어디로? 왜? 서운해서 어떻게 한대?" "저 사실은 이혼했어요." "어이 딱하지.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했어." 그러면서 울상이 되어 말씀하셨다. "이거 갖다가 먹어봐. 아직은 냉이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삶아서 무쳐먹어 봐. 아사기 고추 먹나? 아삭아삭하니 맛있어. 한번 먹어봐." 하시며 이것저것 검은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하셨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사양했지만 소용이 없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다 잘 됐어요. 제가 할 일 다 하고 가니까 괜찮아요. 그 사람과도 잘 정리했어요. 서로 나쁘지 않게... 그래서 괜찮아요. 그동안 따뜻하게 챙겨줘서 감사했어요." "어디서든 잘 살아."그러시며 그 할머니는 나를 따뜻하게 꼭 안아주셨다.
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다 기록하려면 끝이 날 거 같지 않다. 그들이 나의 등을 사랑으로 토닥여 주었다. 그들의 세심한 보살핌이 있어서 고단하고 지친 시간들을 고약하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지나올 수 있었다.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힘들 때 그들의 사랑이 있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깎아놓은 잔디 위에 빗물처럼, 메마른 땅 위에 소나기처럼 촉촉하게 적셔주는 풍성한 나눔의 손길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들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