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때 일본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로 시작해 모 기관에서 통역과 번역일을 했고, 일본 증권회사에도 근무했으며 그러다 일본어 학원에 입사했다. 돈 보다 경험이란 슬로건 하에 여러 가지 일을 해보며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갔다. 그러다 알게 됐지. 일본어 수업을 할 때가 가장 힘이 난다는 것을. 적어도 내겐 그랬다.
대형학원에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그중 새벽반을 13년 정도 했다. 그 좋은 조건 뿌리치고 꼭두새벽에 나가는 나를 보고 주위에선 고생을 사서 한단 얘기를 했다. 6시 반에 시작하는 새벽반 수업은 대체로 회사원들이었다. 20대 중반의 강사보다 수강생들 나이가 더 많았으나 이미 결혼한 나였기에 난 그분들의 가벼운 결혼생활 상담도 했었다. 글을 쓰다 보니 그때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네~
심해진 편두통 탓인지 덕인지 새벽반을 향한 내 질주는 이쯤에서 멈췄다. 대신 주말반 수업으로 바꾸면서 일본어책 출판과 인강에 좀 더 집중했다. 이후 프리랜서로 전향해 개인레슨과 청소년수련관 등에서 일본어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진짜 맨땅에 헤딩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를 보러 와주는 수강생들이 계시니 그저 감사하고 기쁘다.
그러던 중 나에게 새로운 제의가 들어왔다.
2월의 어느 날. 갑자기 (수련관의) 진로지원팀에서 나를 보잖다.
뜬금없이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진로시네마수업이 있는데 거기에 합류할 생각이 없냐는 거였다. 진로시네마란 중학교 1학년과 3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으로 매주 한 편의 영화를 보며 학생들의 생각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중 1 자유학기제와 중 3 전환기교육의 일환으로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두 명의 강사가 더 필요하다는 거였다. 강사들이 할 일은 매주 영화를 선정해 수업시간에 보며 학생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고 생각을 확장시키는 것인데 진로와 연관 지어한다는 것이 포인트다.
"해 보고 싶긴 하나 영화도 그리 많이 보지 않았고 중학생을 가르친 경험도 별로 없어서... "
"자, 내일부터 교육입니다. 선생님!"
(나의 두려움과는 상관없이) 어느새 난 4층에선 일본어 수업을 하고 1층에선 진로시네마 강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리하여 나의 새로운 도전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빡세게 수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과제를 하며 회의를 거쳐 3월부턴 중학교에 보조강사로 나가고 다음 학기부턴 본 강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사춘기 직전의 중 1 친구들과의 만남에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이 복잡한 기차의 선로처럼 교차됐다.
첫날 "슨생님 이거 어디다 써요?" " 화장실 가도 돼요?"라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제 뒤에 서 있지 마세요. 부담돼요"라는 당황스러운 멘트에 "전 덕질 왕이에요"라는 자랑 섞인 대답까지 두 시간 동안 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근데 회를 거듭할수록 이 친구들의 귀여운 진중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5차시 수업이 있던 날, 15소년 표류기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15소년이 표류하게 된 이유, 각각의 캐릭터, 무인도에 대해 설명한 후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인도라는 가정하에 우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누가 우리의 리더로 적합한지 생각하고 얘기를 나누며 나름의 결론을 만들어가는 그런 수업을 한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새기도 하고 때론 목소리 톤이 높아지기도 하고 자기주장만 하기도 하고... 우린(수업을 진행하는 본 강사님과 보조강사인 나)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럴 때가 아냐. 싸우기만 하면 우린 살아서 못 나갈지도 몰라. 일단 불을 피우는 건 어때? 조를 나눠 할 일을 정하자. 일단 난파된 배에 가서 뭐 좀 찾아볼까?"
이런 말들이 오가더라. 한 시간쯤 후 생각을 정리해 모둠별로 발표도 했다. 기특함과 대견함에 우린 박수를 쳤다.
아이들은 저마다 생각의 씨앗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정제되지 않은 미숙함이 있어 때론 거칠고 서툰 표현이 나와도 마음속의 싹은 푸르고 무성한 나무로 자라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러면서도 진지한 이 친구들의 생각과 마음이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도록 중간에서 '이음' 역할을 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도전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