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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Mar 01. 2020

05 비전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통해 주어진 비전

  비전에 대해서 대부분 사람들은 꿈, 미래의 직업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 이상, 전망”으로 나온다. 이러한 정의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사명의 개념과도 부합한다. 미래의 직업이나 꿈 등도 결국 멀지 않은 미래에 될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비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살펴볼 수 있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는 비전은 과연 무엇인가? 기독교인에게 명확한 근거가 있는 개념이므로 교회용어 사전에서 정의한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자


1. 앞날을 향해 꾸는 꿈(포부)

2. 마음속에 그린 이상(상상)

3. 보이지 않는 것(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을 마음속에 그리는 상상력(선견)이나 장래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예지력과 통찰력

4. 하나님이 주시는 이상


  3번과 4번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국어사전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비전은 피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비전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내게 보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비전은 성경에 근거한 것으로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피동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소유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앞서 비전과 관련된 질문에서 “비전이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비전은 궁극적인 비전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시작과 끝” (계22:13)이 있고 그 끝에 무엇인가 일어난다는 성경만이 제시하는 세계관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불교에서는 결국 끝없이 순환하는 “윤회”를 강조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비전은 결코 개념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비전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1992년에 휴거 -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것 - 가 일어날 것으로 믿는 다미선교회가 있었다. 이는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 사건으로 일단락되면서 하나의 해프닝이 되어 버렸지만 그 당시 성경을 잘 모르는 대다수의 성도들 중에는 불안에 떨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비록 때와 시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종말이 있음을 가르친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행1:7)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살전 5:1,2).


  성경은 이 세상의 끝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비전은 요한계시록 7:9~12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9절과 10절에서 우리는 셀 수 없는 무리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4가지 사실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대면하여 있는 것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와 함께 영광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하얀색 옷을 입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죄의 더러움과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인해 – 자유롭고 순결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한 상태로 서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그들은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있다. 그 종려가지는 축하와 개선, 승리, 구속, 기쁨의 상징이다. 하나님 앞에 구속받은 무리들이 세상의 무시무시한 시련과, 죄, 악, 죽음, 오염으로부터 승리함을 축하한다. 넷째, 그들은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찬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을 완전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영원히 그 분의 영광과 함께 완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11, 12절에서는 천사들과 장로, 네 가지 살아있는 생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셀 수 없는 무리의 동료들이다. 이것은 셀 수 없는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있는 모든 생물들의 장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둥글게 서 있는 다양한 존재들의 물결을 이루는 장면이다. 셀 수 없는 무리는 그 분의 위대한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그러면 나머지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리어 경배한다. 그들은 그 분의 찬양, 영광, 지혜, 명예, 능력, 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쉽게도 이 본문 안에 명시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연이다. 로마서 8:19 ~ 22을 보면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대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이와 관련된 말씀을 하신 부분이 있다.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38~40)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주적 예배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나와 찬양과 경배를 하는 장면이다. 그럼 이것과 앞서 정의한 비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예배”의 개념과 비전으로 표현한 문장의 근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배를 나타내는 영어인 worship은 원래 앵글로색슨어인 ‘weothscipe’에서 유래한 것으로 ‘wepth’ (worth, 가치)와 ‘scipe’(ship, 신분)의 합성어인데,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에 합당한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임을 알 수 있다. 즉, 예배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과 같은 개념인 것이다.  



  나는 장로교 합동 측에서 자랐고 세례교인이 될 때 소요리문답을 했었다. 소요리문답은 일종의 신앙고백으로 성경의 주요 교리들을 요약하여 문답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를 받아들여야만 세례를 받고 세례교인이 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고 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즉, 인생의 목적이자 비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며 이를 달리 말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비전과 목적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존파이퍼 목사님의 “여호와를 기뻐하라”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 개념을 간략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사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생각하지만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대소요리문답의 인생의 목적을 변형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대소요리문답의 인생의 목적과 다른 점은 바로 즐거워하는 동사의 목적어가 3인칭 “그”에서 1인칭 “자신”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매우 정당하다고 보이는데 이는 인간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창1:27)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창조물인 인간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바는 그대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시작과 끝” (계22:13)이 되시며 이를 계획하고 이루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전과 우리 인생의 비전이 같을 수 밖에 없다.

 


  앞서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개념을 도출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비전으로서 예배는 세상의 끝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드려지는 “우주적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부르심은 선교사도 목사도 다른 특정 사명자가 아닌 성도(成都) 즉 거룩한 백성으로의 부르심이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명백히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며 구원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적 예배의 참석 대상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계7:9)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지상명령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비전이라는 개념 안에서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내 개인 비전이 담긴 사명선언서 첫 문장으로 이 둘을 모두 포함시켰다.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확장으로 이에 반응하여 선교적 삶을 살아간다." 이 비전의 개념은 누구나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하다. 앞서 정리한 세가지 개념에 따라 비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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