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8~31)”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연상케 한다. 신본주의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입장이고 인본주의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입장으로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시대는 신본주의 시대로 평가되고 이에 반발해 나타난 르네상스 시대는 인본주의 시대로 평가된다. 인본주의로서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한 역사적 배경에는 중세시대가 암흑시대로 불릴 정도로 부정적인데 있다. 한 예로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인 십자군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인본주의로만 평가하기에는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이 시대에 신본주의로 볼 법한종교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인본주의와 대립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라고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성경적 세계관과 세속적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다. 중세시대의 신본주의는 개념적으로 오염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는 세속적 세계관 안에서 이해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보고 접근하지만 세속적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이 철저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희생하신다. (마20:28) 그리고 성경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모두 충족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위의 성경말씀이다. (막12:28~31) 서기관이 첫째가 되는 한 계명을 질문하지만(막12:38) 예수님은 두 가지 -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 를 말씀하신다. 이는 이 둘의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십계명도 요약하면 하나님과의 관계(1~4계명)와 사람들과의 관계(5~10계명)를 나타내는 내용이다. 또한 성경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증명을 위해 사람을, 즉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다시 말하면 하나님 사랑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고(약2:17)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듯이(약2:18) 이웃사랑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행함이 있다고 다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이웃사랑을 실천한다고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우리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옛말과 다를 바 없어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리라”(요14:6)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거짓이 되어 버린다. 행함과 이웃사랑 실천은 믿음과 하나님 사랑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래 그림을 살펴보자
이원론의 영향으로 세속적 세계관에서는 그림 2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지으려 하지만 성경은 그림 3 처럼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사랑이고 이웃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죄로 오염된 세상은 그림 4와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동일시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또한 분리된 부분도 존재하는 긴장상태에 놓여 있다.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기 의를 위한 이웃사랑은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까지 그림 3처럼 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적어도 그림 1처럼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사랑이 되도록 노력할 수 있고 또한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 vs “인류 행복의 증진”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울광염교회(별칭 감자탕교회)는 교회 모토를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는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든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팡세”를 쓴 파스칼도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이는 예외가 없다. …. 심지어 목을 매어 자살하려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 10조에도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명시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10조)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행복할까? 잘 먹고 잘 살면 행복할까? 대체로 그럴 수 있겠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국가들 중에 저소득 국가들이 포함되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양해서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겠지만 보편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을 대한민국 헌법 10조 후반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즉 기본적 인권이 보장될 때 인간을 행복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다.
기본적 인권
기본적 인권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 추구권, 자유권, 평등권, 사회권, 참정권, 청구권 등이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존엄”이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관점은 기독교 세계관과 세속적 세계관이 서로 다르다. 차이의 본질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즉, 창조주로 인해 인간이 존엄한 것인가? 진화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존엄한 것인가?
성경적 세계관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1:26-27)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고 이것 자체로 인간의 존엄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세속적 세계관에서는 어떨까?
사실 일반적인 진화론을 인정하는 순간 (창조적 진화는 논외로 하고)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다를바 없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동물과 달리 존엄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존엄하는 이유는 인격, 도덕, 사랑 등 인간의 고유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고유특성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더욱 잘 드러나다.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산다. 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하는 결정 혹은 행동이 다른 사람을 인간답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면 상관없겠지만 우리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고 내가 배고파서 식욕을 해결하기 위해 빵을 훔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바꿔 말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 속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댈)라는 책이 인기를 끌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를 반영하듯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표어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은 “정의로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책 제목 그대로 “정의(justice)”가 무엇인지 정의(definition)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정의는…” 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한다. 여기에서 “정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이 책의 목적에 벗어나기 때문에 차치하고 성경에서는 “정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성경에는 “의”라는 용어가 참 많이 나온다. “의”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의”를 얻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진 않지만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칭의(의롭다 칭함)를 얻게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사회적 정의”가 화두가 되면서 기독교에서도“의”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하고 있다. 이 “의”가 때로는 “공의”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정의”로 번역될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칭의”에 집중해서 “의”를 개인적 구원에 한정시켰던 부분이 있다. 성경은 사회적 정의에 침묵하지 않는다.(암5:24, 시33:5)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원론의 영향으로 무심했을 뿐이다.
정의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 중 하나는 약자를 돕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전반에 흐르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시다. “고아와 과부”는 대표적인 약자들이고 이러한 약자들을 도외시하지 말라고 하신다. (신24:21, 신10:18, 렘22:3…)
미가서 6:8을 보면 선한 것 즉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공의를 행하는(act justly, 정의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것으로 알 수 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정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인류 행복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인 “하나님의 영광”이나 비그리스도인의 비전인 “인류행복의 증진”은 비록 해석과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지향점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