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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석 Oct 24. 2020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이번 항암주사는 힘드지 않나요?”
“이 항암은 다른 항암제 보다는 순한편이어서,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아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선생님은 항암주사 안 맞아 보셨쟎아요.”


다른 항암제로 바꾸자는 나의 제안을 그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 항암치료때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바꾸게 되는 항암치료는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그걸 어떻게 아냐고 항변했다. 니가 직접 맞아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냐는 것이었다. 까칠해 보이긴 해도 그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전에 본과학생 때 수업시간에 어느 내과 교수님은 본인이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은 직접 다 먹어 본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약을 처방할 때에는 약이 실제로 어떤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면서 하셨던 이야기였다. 약을 처방하기 위해서는 약의 작용방식, 효능, 부작용 등에 대해서 온전히 잘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공부도 해야 하지만, 책으로 백번 공부하는 것보다 직접 한번 먹어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을 하셨다. 

살다보면 의사인 나도 아플때가 있고, 나도 약을 먹을 때가 있다. 변비약이나 감기약, 위장약, 기침약, 항생제 등은 나도 먹을 일이 생긴다. 이런 약들을 내가 늘 처방하는 약이지만, 막상 내가 먹어보면 느낌이 참 다르다. 

변비약을 먹었을 때에는 배가 부글거리는 느낌이 들고, 해열제를 먹으면 땀이 살짝 나면서 열이 떨어진다. 이런 것들을 직접 겪어 보면, 환자분들이 이야기하던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비로소 알게 된다. 스스로 겪어봐야만 자각할수 있는 몸의 느낌은 책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 철분약을 먹으면 대변이 검게 나온다는 것은 책으로 배워서 알고 있으나, 막상 내 대변이 까맣게 나올 때 어떤 기분이 드는 지는 직접 먹어보기전에는 알수 없는 일이다. 교과서나 약전에 적혀있는 활자화된 설명은 시각과 인지기능으로 뇌속에 저장되지만, 몸으로 겪는 지식은 경험으로 몸에 저장된다.

사용자로서 내가 먹어본 약의 경험은 분명 처방자로서 약을 처방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예전에 철분약을 먹어보았을 때 소화가 안되고 배가 살살 아픈 느낌을 겪은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는 철분약 처방은 잘 안하게 되었다. 환자에게 빈혈이 생기면 나는 철분약 대신 수혈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아마 내가 직접 수혈을 받아보고 수혈 부작용을 직접 경험해 본다면, 나는 수혈을 가급적 하지 않는 의사로 변신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항암제이다. 나는 항암주사를 놓는 사람이지만, 정작 나는 항암주사를 맞아본 적이 한번도 없다. 소화제라면 시험삼아 먹어볼텐데, 항암제는 시험삼아 맞아볼 수도 없다. 항암제를 맞으면 어떤 느낌이 들고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내가 직접 경험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다. 내가 인지하는 항암제 부작용은 환자분들의 말과 책으로 얻어진 간접경험들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한번도 맞아본적이 없는 독한 항암주사를 암환자에게는 밥먹듯이 권하고 있다.


진통제도 그렇다. 나는 진통제를 밥먹듯이 처방하는 의사이다. 암성통증이 심한 환자들에게 마약성 진통제를 권한다. 아프면 참지 말고 마약성 진통제를 아끼지 말고 팍팍 먹으라고 환자들에게 처방을 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암성통증을 겪어본적도 없고 마약성 진통제를 먹어본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매일 처방을 한다. 


환자들의 고통을 직접 이해하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직접 내 몸에 투여하겠다고 하면, 나는 마약류 관리법 위반으로 잡혀갈 것이다. 나에게는 마약성진통제나 항암제의 직접경험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다.

또한 나는 암환자를 보는 사람이지만, 정작 나는 암에 걸려본 적이 없다. 암에 걸리면 어떤 심정이 되는지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다. 내가 암에 걸리기 전까지 나로서는 그 심정을 100% 정확히 이해하고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일까 의사 본인이 암에 걸리고 나서 그제서야 암환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의사 본인이 직접 암에 걸리고 나서 환자가 되어보니, 의사들이 그렇게나 불친절하고 냉정하다는 것을 반성하는 이야기도 많다.  환자들은 암 투병을 해본 의사를 (이왕이면 암에 걸려서 완치된 의사를) 선호하기도 한다. 저 의사는 암에 걸려보았으니 암환자인 나를 더 잘 이해해줄것이라 생각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암을 겪어본 의사는 아주 소수이다. 설령 그런 의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의사는 대부분 진료현장을 떠난다. 의사도 사람이기에 암에 걸리면 병가를 내고 본인 건강부터 챙기게 될 수밖에 없다. 암진료의 현장에서 대형병원 의사들은 보통 하루에 100명 가까운 외래 환자를 보며 하루의 절반가까운 시간을 중노동하며 지내는데, 암에 걸리면 그런 암치료의 최전선에 계속 머무르기가 힘들다. 암을 치료하는 의사가 암에 걸리게 되면 본인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중노동의 현장을 떠나게 되고, 그러면 현장은 암환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로 다시 채워진다. 


결국 암을 겪어본 적도 독한 항암제를 맞아본 적도 없는 의사들이 밥먹듯이 독한 항암주사를 처방하게 된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양내과 의사들이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의사라고 흰 가운입고 앉아있지만, 결국 나는 내 간접경험을 바탕으로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 경험이 되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과연 타당한 일일까… 



예전에 다른 환자분을 진료할 때의 일이었다. 

“선생님, 지난번에 제가 맞은 항암제가 혹시 VP-16이라는 약입니까?”


환자분의 입에서 나온 VP-16이라는 단어를 듣고 깜짝 놀랐다. VP-16은 에토포사이드(etoposide) 라는 항암제의 옛날 이름이었다. 에토포사이드는 30여년 전에 국내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엄청난 최신 항암제였다. 에토포사이드가 처음 들어왔던 순간을 기억하는 60대 의사들은 VP-16이라는 예전 이름을 많이 썼다. 하지만, 지금은 구시대적 독한 항암제의 대명사가 되어있는 에토포사이드를 그 누구도 VP-16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요즘 의사들에게 VP-16이라는 단어는 ‘창경원’이나 ‘중앙청’ 같은 느낌의 시간여행자나 쓸법한 역사속 단어이다. VP-16이 뭔지 모르는 젊은 의사도 많다. 그런데,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분이 지난 번에 맞은 항암제가 VP-16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였다.  


“네. 맞아요. 지난번에 맞은 항암제가 VP-16맞구요, 에토포사이드라는 약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VP-16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는데 VP-16라는 말은 어떻게 아세요?”
“예전에 30년쯤 전에 제 어린 아들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습니다. 백혈병이 재발되어 항암치료 할 때 제 아들이 맞았던 항암제가 VP-16이었습니다. 그때 VP-16 맞으면서 아들녀석은 너무나 힘들어 해서… VP-16은 아직도 제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운명인지 저도 VP-16을 맞게 되었네요. 부자가 무슨 운명으로 같은 항암제를 맞는지… 주사 맞다가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어렸을 때 급성백혈병을 앓았는데, 나은줄 알았던 백혈병이 재발하며 속수 무책으로 나빠졌다. 다른 치료법이 없어서 의사는 당시로서는 최신항암제였던 VP-16을 권했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VP-16을 맞게 되었는데 어린 아들은 항암제를 힘들어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포독성 항암제는 어른도 힘들어 하는데, 10살채 안되는 어린 아이에게는 세포독성 항암제는 그야말로 독한 약이었다. 제대로된 구토방지제도 항암제 부작용 예방약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이는 주사 맞기 싫다며 땡깡을 부렸다. 아이는 주사 안 맞겠다고 버티기고, 아버지는 주사를 맞아야 산다고 다그치고, 그렇게 몇날 며칠을 실랑이를 하였다. 아이는 항암주사 안 맞는다고 하다가 아버지에게 혼나고, 울면서 주사를 맞았다. 주사 맞고 토악질하고 힘들고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도 미어졌지만, 아이를 살리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아이는 많이 힘들어 했고, 힘든 치료를 강요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빠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아이는 이렇게 항암치료 받을 바에는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는 살려면 무조건 항암치료 해야한다며, 마음 약하게 먹지 말라고 윽박아닌 윽박을 질렀다. 네가 부모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버지를 봐서라도 한번만 주사 맞아 달라고 애원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자는 서로를 원망하며 끌어안고 엉엉 울면서 항암주사를 계속 맞았다고 한다. 

 그렇게 힘든 항암주사 맞으며 버텼지만, 안타깝게도 VP-16은 효과가 별로 없었고, 아들은 먼저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다. 그리고 3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번에는 그가 소세포폐암을 진단받아 예전에 아들이 맞았던 그 VP-16을 본인이 맞게 되었다. 


“주사 맞다가 아들 생각나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는 항암치료가 힘들었다고 했다. 본인이 직접 VP-16을 맞아보니, 그때 어린 아들이 왜그리 항암제를 맞기 싫어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짜피 듣지도 않았을 약인데, 왜 그리 모질게도 치료를 강행했는지 후회도 되었다고 했다. 그는 30년 전에 먼저 하늘나라로간 어린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참을 울었고 했다. VP-16을 직접 맞아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일이었다. 


세상에는 겪어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너를 이해한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한다. 너를 이해해. 너를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우리는 과연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그 사람이 입장이 되어야겠지만, 우리가 인지하는 사고의 틀 안에서 온전히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너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근본적으로 나는 너가 아닌 나이다. 

상대방이 해왔던 수많은 직접경험은 나에게는 그저 간접경험일 뿐이며 드러나는 일부만 보게 되는 피상적인 일들이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자체를 거꾸로 올라가서 그가 해왔던 직접 경험들을 내가 똑같이 경험을 해오며 그의 위치에서 그의 삶 속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본디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오랜 시간 동안 경험을 공유하는 가족이나 배우자 정도가 되어도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던가.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 간접 경험은 본질이 아닌 피상으로만 그치게 된다.


 그러다보니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도 사실은 본디부터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단어를 쓸 때에 ‘이해’라는 단어는 그저 ‘나의 처지에서 너를 바라보건데, 이러 이러한 점 때문에 네가 이런 이런 점을 느끼리라 간접적으로 추측해 본다’ 정도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정도의 어감으로 ‘이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그러면서 상대방을 정말 이해한 것처럼 혼자 뿌듯해하는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이해’하는 나의 사려깊은 헤아림에 스스로 대견해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때에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는가는 별개일 것이다. 


 어느정도 살다보니, 세상에는 정말 겪어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령 자식만 해도 그렇다. 자식을 낳아 봐야만 알수 있는 일은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책에서의 간접 경험으로 부모됨을 이해했다고 하면 그것은 100% 거짓말이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을 해보지 않고서는 사랑의 감정을 이해할수 없다. 반대로 사랑을 잃어 보지 않고서는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없다. 이렇듯 직접경험만이 이해의 근간이 되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햇병아리 의사 시절, 환자분을 이해했다고 느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순전히 내 착각이었음을 알게되는 일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의 대부분은 그저 내 착각일 뿐이었다. 그런 착각은 나의 오만함으로 이어진다. 이해했으니 이제는 귀를 닫아도 되겠다는 그런 오만함 말이다. 가뜩이나 귀가 충분히 열린 사람도 아니고, 귀를 열기에 충분한 진료 시간을 갖고 있지도 못한 내가 환자를 다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지니 결과는 뻔했다. 이해는 커녕 겉돌았다. 그나마 겉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다행이다. 겉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이해했다 치고 넘어가는 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는 진료하면서 환자분께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거나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편해졌다. 나는 암을 진단받아본적도 없고, 항암치료를 받아본적도 없기에, 아무리 많은 환자를 보더라도 분명 이해도는 떨어질 것이다. 


어쩌면 너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보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사랑은 할 수는 있다. 모르더라도 사랑은 할 수 있다. 알고 하는 사랑보다 모르고 하는 사랑도 많지 않던가. 사랑은 그래서 더 위대하지 않던가. 


VP-16을 맞으면서 30년만에 아들을 이해하게 된 그를 보면서, 우리가 과연 진심으로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 일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상대방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암에 걸려서 항암제를 직접 맞아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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