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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석 Oct 17. 2020

별과 별사이

600대 1의 관계


그는 별을 헤아리는 사람이었다. 천문학자였던 그는 별 보는 직업이지만 별 볼 일 없는 직업이라고 했다. 별의 개수를 세고, 새로운 별을 찾아내고, 별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여러 일을 한다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과학 상식이 짧은 내가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암에 걸리고도 그는 연구와 집필 활동, 여러 강의를 열심히 하였다. 


“선생님 오후에는 외래를 몇 시까지 봅니까?”

“오후 외래요? 말이 좋아 오후 외래지 저녁까지 봐요… 일곱시에 끝나면 빨리 끝나는 편이에요.”

“어이쿠야.. 일곱시까지 외래를 보세요?”

“제가 하는 일이 원래 그래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제가 한시간을 기다려보니까 한시간 동안 선생님 외래에 들어오는 환자가 10명 정도 되더라구요. 홈페이지 보니까 외래가 월수금이던데, 지난번에 보니 오전 외래는 두어시까지 보는 것 같고, 오후 외래를 그 시간까지 보시면… 그러면 일주일에 외래 보는 시간이 20시간정도 되고, 일주일에 200명을 보시는게 되더라구요. 이분들이 대략 3주 간격으로 온다고 하면 600명 정도가 되는데… 선생님 보시는 전체 환자 숫자가 600명 정도 되나요?”


별을 세는 직업을 가진 사람 답게 환자 숫자도 잘 세었고, 그의 계산 법은 꽤 정확했다. 사실 600명 보다 더 되긴 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실망할 것 같아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하였다. 그가 또 물었다. 


“600명 환자를 다 기억할 수는 있으세요?” 

뭔가 허를 찔리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별 이름 600개는 기억하세요?”

외래 시간도 없고 적당히 넘어가려 하는데,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그 600명 중 한 명인 거네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였다. 


“선생님한테는 제가 600명 중 한 명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선생님 한 명이거든요.” 


그가 한시간동안 환자 숫자를 세면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상대방의 비율을 추정하기 위해 한시간동안 환자 숫자를 세고 있었다. 그리고 너한테는 내가 600명 중 한명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너 하나 뿐이다 라는 고백 같은 말을 하였다. 


갑자기 가운을 벗어던지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다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고매한 희생정신과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국종 선생님 같은 의사도 아니고, 그저 밥벌이로 의사를 하고 있는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다. 600명에게 단 한 명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그런 과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600명 중 한명이라는 단어는 내 머리 깊숙이 꽂혔다. ‘600명 중 한 명’과 ‘한 명 중 한 명’. 이것이 그분이 느낀 의사 환자 사이의 간극이었던 것이다. 암이라는 생사를 다투는 절박한 병 앞에서 그는 의지처를 찾아야 했고, 평범한 나는 흰 가운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는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엄마 같은 혹은 신과 같은 대상이었다. 나는 졸지에 600명의 신도를 거느린 교주가 되었고, 그는 나에게 ‘600대 1이라는 불균형’과’ 600대 1이라는 거리’를 일깨워주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거리와 선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 적절한 선, 편안한 거리를 찾는다.  그 적절한 선은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관계의 깊이는 여러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 만남의 빈도, 감정적 교류, 공동의 목표의식, 서로 간의 이해관계, 두사람의 친밀도, 성향, 심리적 거리, 그리고 물리적 거리. 여러 다양한 요인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는 적절한 선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거리는 상대방이 생각하는 적절한 거리와 늘 다를 수 있다. 


 환자 의사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다. 대개 의사가 생각하는 거리는 환자가 생각하는 거리보다 멀다. 600배만큼은 아니어도 분명 멀다. 의사들은 많은 환자를 본다며 바쁘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학회장에서는 많은 환자를 본다고 자랑하고, 많은 환자들이 몰려드는 명의라는 타이틀을 얻으면 기뻐하며, 병원 경영진 앞에서는 많은 진료 실적을 냈다고 뻐긴다) 많은 환자를 보다보면 기계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진료하곤 한다. 나 역시 외래를 볼 때 그런 기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기계적으로 환자를 보다 보면 환자 한 명 한 명의 모든 상황을 신경쓰지 못할 때가 많고, 그런 것은 어김없이 환자분들의 서운함으로 돌아온다. 세세한 것을 신경쓰지 못할 때마다 그들은 나와의 거리가 멀어진다고 느끼고, 급기야는 600대 1이라는 숫자가 오늘 튀어 나온 것이다. 이 의사가 나 한 명만 봐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서운함이 나오고 불만이 나온다. 공감 따위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600대 1은 좀 심한 것 아니냐는 항변은 분명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관계의 불균형은 권력을 낳고, 불만을 낳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족 같은 의사를 원한다. 가족처럼 비대칭인 상황에서 나를 따뜻하게 대해줄 수 있는 의사를 원한다. 병원 홈페이지에 있는 의사 프로필, 의사 소개에는 환자를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의사들이 넘친다. 어찌된 노릇인지 의사들의 진료 철학은 죄다 환자를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것이다. 진료 철학인지 호객 행위인지 알 수 없으나, 가족 같은 의사는 지하철역 전단지처럼 마구 뿌려지고 있다. 그런 의사들은 사진 속에서 무척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다. 




나는 환자를 잘 보는 편도 아니고 거창한 진료 철학을 가지지도 못해서 병원 홈페이지 의료진 소개에 쓸 문구를 아직 찾지 못하였다. 환자를 이해해주는 따뜻한 의사, 환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의사 따위의 말은 낯간지러워서 쓰지도 못하겠다. 그러하지 못함은 스스로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나는 의료진 소개에 그저 밥벌이로 성실히 출퇴근하면서 큰 실수 안하고 환자에게 나쁜 짓 안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싶은 정도라고 쓰고 싶다. 3분진료에서 질문도 잘 못 받아주고, 대체로 불친절하고, 말을 툭툭 내던지는 직설적인 타입이니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말라고 써 놓고 싶으나, 그러면 병원에서 싫어할 것 같아서 아예 진료철학 따위는 써 놓지 않았다. 내 진료 철학은 빈칸이나, 적어도 환자를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거짓말은 쓰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환자를 가족같이 대하는 의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환자는 의사의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걸 깨달은 돈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의사 사위를 봐서 의사를 진짜 가족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어떤 의사는 비싼 가격에 그들의 가족이 되기도 한다. 


600대 1이라는 간극은 ‘가족 같은 의사’라는 환상을 만들어냈고, 그 환상은 병원 홍보 홈페이지에 넘쳐난다. 저 의사가 나를 가족같이 대해줄 것을 기대한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그 생각을 접기 바란다. 어차피 당신도 당신이 죽을 때 담당 의사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가족 한명이 생을 마감하면, 남은 가족들은 고인을 기리며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한명만 그래도 힘든데, 가족이 600명이고 600명을 떠나 보내야 한다면 그 사람은 필시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온전한 정신으로 보기 위해서라고 변명을 하지만, 환자의 감정에 빨려 버리면 의사도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워진다. 감정적으로 소모되어 지쳐버린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환자와 적절한 거리를 찾는다. 그 거리로 인해서 가족 같은 의사는 현실에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사람들에게는 각기 그 나름의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고, 그러한 사정들은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형성한다. 만족스럽던 만족스럽지 않던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거리는 상대방이 생각하는 적절한 거리와 늘 다를 것이다.  


“선생님한테는 제가 600명중 한 명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선생님 한 명이거든요.” 


그렇게 그는 그날 나에게 거리라는 것에 대해 새삼 일깨워 주었다. 




그가 일깨워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별에 대한 것이었다. 



별을 헤아리는 그는 우주에 관한 책을 몇 권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코스모스를 비롯한 우주에 대한 책과 그가 직접 쓴 책들을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가 준 책들을 정독했다. 책 속의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고, 나름대로 별과 우주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터스텔라 영화가 나왔을 때에는 그는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그에게 별 이야기를 들을 수록 별들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몰랐을 때에는 그냥 점 같은 불빛 하나였는데, 알고 보는 별들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우주였다. 내가 보는 별빛이 수천 년 전에 출발한 빛알갱이임을 생각해보면 나는 수천 년 전 그 별의 과거를 현재 보고 있는 것이었다. 수천 년 전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낀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얽혀 있고, 시간은 흘러가지 않으며, 시간은 이미 다 펼쳐져 있고, 미래 현재 과거가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임도 경외감을 느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두가지 요인인 중력과 조건 없는 사랑에도 경외감을 느낀다. 언젠가는 찾아오게 되는 죽음을 시간을 통해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에도 경외감을 느낀다.  


별을 볼때마다 저 별이 나와 수만 광년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연애하던 시절 밤하늘의 별도 따다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을 남발하고, 말도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낯뜨거운 유혹에 다 넘어가지 않았던가. 지금은 애아빠가 되어있는, 별도 달도 다 따다 주겠다던 그 시절 그 오빠를 지금 와서 약속불이행으로 고발하지는 않는다. 나만 바라보는 별이 되어주겠다던 그 시절 그 오빠도, 바람만 피우지 않으면 별이 안되어 있어도 크게 원망하진 않는다. 별이 한두개도 아니고 지구상의 사람도 한두명이 아닌데, 어찌 나만 바라보는 나만의 별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수 천억개의 별 중 하나의 별과 수십 억명의 사람 중 하나의 사람이 그저 밤하늘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만해도 기적 같은 일인데, 거기에서 어찌 1:1로 나만 바라보는 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나만 바라보는 별이 되어주겠다던 그 사람이, 저 멀리 있었던 그 사람이, 연애라는 은하수 같은 강을 넘어 언제든 가까이 있는 가족이라는 존재로 되어 있음에 만족하며 살 뿐이다.  


우리는 별을 보며 별은 수만 광년의 거리에 존재해 있고, 이는 km로 환산하면 수천 조 km 이며, 자동차로 달리면 수천 경 년을 달려야 도달하는 거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 마음에 와 닿는 거리로 생각하고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마음속에 담아둘 뿐이다. 멀어도 멀지 않다 믿으며 마음속에 가깝게 있다고 생각한다. 

별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어도 멀어 보이지 않듯, 환자분들과 나 사이의 거리도 멀어도 멀어 보이지 않길 바래 본다. 멀어 보여도 멀지 않는 관계는 적어도 가족 같은 관계보다는 쉬울 것이다.




별을 헤아리는 일을 하던 그는 작년 4월에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 별은 밤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밤 하늘의 그 별을 볼 때마다 이제는 600대 1이라는 관계에서 1대 1의 관계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멀어 보여도 멀지 않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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