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학년 1반
✿ 3월 11일 정현 "훔쳐보기"
오늘은 할머니 관찰일기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할머니가 안 계셔서 분명 마을회관에 계실 거라 생각해서 회관에 가서 창문으로 몰래 훔쳐보고 계신 걸 확인했다. 다른 할머니들과 수다를 하시고, TV 보시고... 그게 끝이다. 계속 그럴 것 같아서 의자를 가져와서 회관 창문 아래에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할머니가 나오셨다. 유모차를 밀고 비닐하우스에 가보시고 집에 오셔서 TV를 보시고 우리랑 식사하시고 다시 누우셔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시다 주무셨다. 옛날엔 화투를 잘 치셨는데 요즘엔 안치시는 것 같다.
다음엔 선생님을 관찰할 것이다. 절대 들키지 않을 거다.
❁ 쌤
이렇게 가족의 관찰 일기를 써보라고 한 것은, 무심히 지나치던 일들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할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뜻이야. '아... 우리 할머니는 하루를 이렇게 보내시는구나... '
그리고 그 뒤의 네 느낌이 중요한데 그게 빠졌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적으면 글이 더 살아날 거야.
나중에 읽어도 그 장면이 저절로 떠오를 거고.
기계적인 관찰 말고 애정 어린 시선.
❁ 쌤
3월 14일 찬영에게
찬영아,
좋은 만남, 인연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란다.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가능해. 내가 너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도, 네가 나에게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도. 이 일기를 쓰는 것도 그런 노력 중의 한 가지야.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지. 저 위의 네 글씨를 보니 잘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지려 한다.
결론- 1시간 남을 것. 꽝!
✿ 찬영
한 번쯤은 생각을 해보았던 능력들이다. 투명 인간, 시간 멈추기 등등. 하지만 요즘 들어 내가 가장 바라는 능력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다. 옛날로 돌아가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던지, 망친 시험을 다시 본다던지...... 하지만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란 것을 나도 안다. 그런데! 오늘은 꼭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 이유는 일기를 너무 짧게 쓰고 글씨도 엉망인 어제 일기 때문이다. 어제 피곤한 데다 우영이형과 말다툼을 한 탓에 기분이 상해서 집에 왔다. 이유가 너무 어이없어서 더욱 슬프다.
선생님 정말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고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 쌤
올~~~!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거지.
이렇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까 키울 맛 난다.
✿ 찬영
데헤헤햇
✿ 3월 15일 정현 " 내 피 같은 것"
동생이 김치볶음밥을 해달라고 해서 김치를 꺼내러 김치냉장고 앞에 갔는데 뭐가 밟혀서 봤더니 병뚜껑이었다. "어? 뭐지?"하고 주변을 보니 작년 와인체험학습 때 만들어왔던 와인병이 뚜껑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막아놓으려 했는데 잘 안 막아졌다. 엄마 아빠한테 전화하니 버리라 했다. 종이컵에 따라 보니 탄산이 있었다. 그래서 맛있을 것 같아서 선생님께 "마셔도 되겠습니까?"라고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다가 "마셔."라는 메시지를 보고 마셨는데 썼다.
한참 후에 보니 선생님이 "5년 후에"라고 보내셨다.
한 번 더 먹어볼까 해서 먹어봤는데 괜찮았다.
어? 나도 이제 어른?
(선생님의 시간차 공격 효과는 굉장했습니다.)
❁ 쌤
'마셔' 보낸 다음에 곧바로 '5년 후에'라고 보냈는데
일부러 '마셔'까지만 보고 후다닥 벌컥! 벌컥?!
어차피 맛있는 와인이 되긴 힘들 테니까 고기나 생선 요리할 때 넣으면 냄새 제거에 좋음.
대신 많이 넣으면 취한다는 장점이 있음.
✿ 3월 18일 은아 "천천히 다가온 변화"
10시쯤 밥을 먹고 일주일에 1~2번씩 꼭! 하는 대청소를 했다. 방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다음 온 방을 다 쓸고 닦고 집안 대청소를 끝냈다. 그리고 이불, 베개 커버까지 싹 세탁기에 돌리고, 그다음 교복도 세탁기에 돌렸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 마당에 있는 블루베리 나무를 발견했다. 이 블루베리 나무는 작년 9월쯤 체험학습 갔을 때 화분에 심어 온 나무인데 아직도 살아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처음 2달 정도는 사랑도 듬뿍 주고 잘 관리해 줬는데 그 후로 몇 개월 동안 버려진 것처럼 마당에 초라하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죽은 줄만 알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주 미세하게 자라고 있었다! 꽃봉오리도 몇 개 나왔다. 나는 울컥하면서도 신기했다. 앞으로 정성을 ㄷ해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블루베리야... 그동안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해... 앞으론 잘할게. 이쁘게 자라주렴.
❁ 쌤
이쁜 일기네.
돌봐주지 않아도 가냘픈 가지로 지난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꽃까지 피워낸 씩씩한 나무가 대견하다.
작은 꽃봉오리를 바라보는 은아의 모습도 이쁘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참 아름다워.
꽃도, 우리 은아도.
✿ 3월 26일 세훈 "부안에서"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려고 부안에 갔다. 병원에 가기 전 할머니가 옷을 사준다고 하셔서 아디다스에 들어가 옷을 골랐다. 11만 9천2백 원이었다. 너무 비쌌다. 할머니는 옷을 사주면서 항상 하시는 말이 있다. "잘하라고 사주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안 살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쌤
아놔... 아주 기냥 중2 인증을 하는구나.
"넵! 앞으로 더 잘할게요!" 하면 되지 뭘 또 '안 살까?'야.
아오~~
✿ 4월 5일 은아 "찡~하게 만드는 우리 할아버지"
선생님께서 진달래 화전을 만들어 먹자고 하셨다. 진달래꽃을 가져오기로 했던 지우가 잊어버리고 그냥 오고, 규진이가 가져오긴 했는데 너무 적다고 하자 한쪽에서 찌질하게 질질 울고 있었다. 웃겼다.ㅋㅋ 오늘 집에 와서 우리 마을에도 진달래가 있는 것 같아서 할아버지 데리고 산에 갔다. 고소한 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하며 꽃을 찾으러 다니고 사진을 찍었다. 할아버지랑 소풍 가는 느낌? 그렇게 한참을 가도 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뒤돌아왔다. 그렇게 집에 와서 아까 직은 사진을 보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너무 말르고 주름이 많아 맘이 찡했다. 손녀로서 너무 죄송하고 마음이 아프다. 할아버지는 내 말은 다 들어주신다. 그래서 더 죄송하다.
❁ 쌤
뭔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기네...
손녀랑 진달래 찾으러 함께 가주시는 할아버지. 참 좋은 분이시구나.
사진 보면서 맘이 찡하다는 우리 은아도 이쁘고.
어제 저녁에 은아가 내게 보내 준 사진들, 나도 한 참을 바라봤단다.
2017년,
부안읍내에서 20분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면 단위의 작은 학교.
전교생은 16명, 우리반은 1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