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회색노트
회색 노트라는 책에는
다니엘과 자크라는 두 소년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더 깊은 우정을 쌓기 위해
둘만의 비밀노트를 마련한다.
두 소년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그 노트가
바로 회색 노트인 것이다.
누구나 회색 노트를 꿈꿀 것이다.
우린 늘 마음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하니까.
혼자만이 아닌 두 사람만의 비밀은
더 비밀스러운 느낌을 준다.
나도 그랬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아이들과의 회색 노트를 갖고 싶었다.
늘 생각은 하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1993년, 2학기에 들어선 어느 날
벌떡 일어나 밤거리로 나섰다.
다 둘러봐도 회색 노트는 없었다.
뒤지고 뒤져 희끄무레한 색을,
그것도 모자라 녹색노트까지 44권을 사들고 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것이 우리 비밀 노트의 시작이었다.
내 마음을 설명해 주고,
아이들과 나의 다리 역할을 해줄 것이라 기대를 하며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교실에 들어서면
교탁에 놓인 일기를 열어보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 안에는
내 아이들의 슬픔과 기쁨, 고민과 꿈,
그리고 아주 가끔씩은 깜찍한 사랑이야기도 적혀있곤 했다.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더러는 눈물을 훔쳐내기도 하면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도 뭔가를 적어내려 갔다.
적어도 하루에 2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했지만,
바쁜 일상 속에도
우리들의 독특한 대화를 갖는 그 시간이 참 즐거웠다.
노트를 들고 과학실로,
테니스 코트 앞 벤치로,
강당으로 가는 계단에 앉아서
간간이 들려오는
우리 반의 책 읽는 소리,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이 쓴 일기에 나도 뭔가를 써 주는 시간은
평화롭고 행복했다.
일기를 내고 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으러 오던
아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일기를 받으면
책상 밑에 놓고 살며시 펼쳐 보며
빙그레 웃는 그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우리의 회색 노트는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어주고
서로를 향해 한 발씩 다가서
마침내 손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야말로 비밀 노트인데
이렇게 공개하면 어쩌냐고
아이들은 내게 따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진짜 비밀은 남겨두었고,
그리고 우리끼리니깐 아주 쪼끔만...
-1993년 학급문집에서.
1993년부터 아이들과 쓰기 시작한 일기는
2020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모아
19권의 학급문집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