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2018년 6월
서른 살 가을, 지리산과의 만남이 작은 시작이었습니다. 그 산에 반해 몇 년을 부지런히 산길을 드나들던 내 발걸음은 남도와 제주, 서울로 드문드문 이어졌습니다. 별다른 목적은 없었습니다. 그때그때의 우연에 따른 여행이었습니다. 그 여정이 어떤 특정한 의미를 지니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만으로 마흔을 넘길 무렵 내 인생의 가장 혹독한 고비를 맞았습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투병과 죽음은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보이게 했습니다. 단 한 사람이 사라졌는데 이 우주가 절반쯤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지나온 모든 시간이 후회되었고, 앞으로의 시간에 아무 기대가 가지 않는 막막한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시간을 견디던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지나온 길을 되짚어볼 수는 있겠다고. 내가 그간 애정을 기울여왔고 내게 살아갈 힘을 주었던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지나간 삶 속에 깃들어 있었지만 내가 놓치고 있던 빛이 있다면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타인이 비춰주는 큰 등대의 불빛보다 내 안의 작은 나침반이 절실한 시기였습니다.
기억되지 않는 무수한 시간의 갈피에서 단편적인 몇몇 글월이 내 정신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대부분 여행의 기록이었습니다. 십여 년에 걸쳐 끊어질 듯 이어진 기록과 메모를 들여다보며 내게 있어 여행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가벼운 탈출이나 휴식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내 정신에 자취를 남긴, 일종의 순례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례란 신이 나타났거나 다시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는 장소, 혹은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경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아오진 못했지만 고맙게도 내게 순례의 땅이 되어준 곳이 있습니다. 그 장소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 정체성에 심원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하나 이상 담고서 내게 말을 걸어준 장소들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 땅의 어느 구석진 길모퉁이도 아픈 역사 한 자락과 닿아 있지 않은 곳이 없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 세대가 겪었던 고통의 흔적을 조금씩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아픔을 확인하는 과정이 내게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현재의 모든 혼란과 고통은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으며, 나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가 길에서 배운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조금쯤 힘겹습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앎과 사랑은 여전히 부족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길이 성스러운 땅이라는 그 한 가지 사실이 나그네에게 힘을 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