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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앙카 Dec 23. 2022

빨간딱지와 고드름 나는 집

가난의 증표

  1990년대 1기 신도시 평촌 범계역 뒤편, 안양시 호계동에는 행복한 나의 집이 있었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주택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골목어귀에 지은이네 슈퍼가 있고 선미네 초록 대문을 지나 제일 안쪽 끝이 우리 집이다. 언제나 골목길은 우리들의 아지트이자 놀이터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숨바꼭질, 말뚝박기, 얼음땡, 고무줄놀이 갖가지 놀이를 하며 내 집 남의 집 할 거 없이 발 닫는 모든 곳이 우리 차지였다. 대문 앞 초인종을 누르고 "친구야 노~올~자"를 외친다. 빨래 널린 옥상 위로 올라가 장독대 뒤에 숨는다. 술래가 나를 찾아 줄 때까지 머리카락이 보일 세라 쪼그려 앉아 숨죽여 기다린다. 쪼그려 앉아 있다 보면 어찌나 쉬가 마렵던지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장독대 옆에 몰래 지도를 그려놓는다. 샛노란 옥수수가 손에 쥐어지는 날엔 친구 한알 주고, 나는 두 알 먹는다. 동네 꼬맹이들로 가득 찬 활기차고 따스했던 호계동 골목길 우리 집.


  지은이네 슈퍼 앞에 택시 한 대가 선다. 지팡이를 짚고 멋쟁이 모자 쓴 나의 할아버지가 내린다.

“할아버지~”

 친구들과 놀다가도 할아버지를 보는 날에는 뒤도 안 돌아보고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꼭 안겨 집으로 돌아간다. 할아버지 손에 든 검은색 비닐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너무 궁금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세 들어 살던 우리 부모님에게 싸게 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우리는 이층으로 올라갔고 우리가 살던 일층은 나이 든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세를 주었다. 이층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면 빨간 벽돌로 만들어 놓은 물고기 집이 있다. 쪼르르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금붕어 밥 너무 많이 주면 안 된다고 조금씩 조금씩 물고기 밥을 주고 들어간다.    

  새하얀 커튼이 바람에 흩날린다. 엄마는 한복집에서 삯바느질거리를 가져오셨고 틈나는 대로 미싱으로 온갖 덮개(피아노, 식탁, 의자덮개와 커튼까지)와 옷을 만들어 파셨다. 엄마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잘 드는 우리 집이 나는 제일로 좋다. 아빠가 일을 쉬시는 날에는 블루스 음악을 틀고 내게 춤을 가르쳐 주셨다. 내 작은 발은 아빠의 발등 위로, 두 손은 아빠와 맞잡고.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까르르 웃으며 환한 미소 짓던 9살, 10살 그쯤이 내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우리 가족 모습의 끝자락이다.   


열쇠 목걸이와 빨간딱지의 의미


 어느 날 엄마가 열쇠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셨다. 현관열쇠였다. 앞으로 큰어머니 식당에서 일을 해야 해서 내가 학교에 갔다 와도 엄마가 집에 없을 거라고 하셨다. 잃어버리지 않게 목에 잘 걸고 다니라고 두 눈을 꼭 마주치시며 말씀하신다.


'딸칵.'

아무도 없다. 또 혼자다. 아직 언니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학교에 갔다 오면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맞춰 손빨래하던 엄마의 뒷모습은 언제부터인가 볼 수 없었다. 조용한 집에서 종이인형을 오려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겼다. 종이 인형과 미미인형이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언니가 빨리 와서 같이 놀았으면 좋겠다.

 어쩐지 외로우면 골목으로 나가본다. 열쇠 목걸이가 생기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다. 기다림과 외로움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된 게 그때부터였을까.


 등교 전 아침 가정통신문에 부모님 사인받기 위해 조용히 안방 문을 열어 엄마를 깨운다. “엄마, 여기에 사인받아오래.” 엄마는 졸린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신다.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순’이라고 쓰시고 동그라미를 그리신다. 부스스한 엄마의 모습이 많이 피곤해 보인다.



 

 그날은 집안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낮시간인데 엄마와 아빠가 집에 계셨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하다. 집안 곳곳에 처음 봐 보는 빨간딱지가 붙어있었다. 나와 언니가 아끼는 피아노에도 붙어있었다.

“엄마 이거 뭐야?”하고 빨간딱지에 손을 대려는 순간 만지면 안 되는 것이라며 내 손을 잡으셨다. 절대 떼어내서는 안 되는 빨간딱지. 저게 뭐길래.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있었다. 큰아버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아빠가 빚보증을 서 주셨던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에만 세 번째 나가시는 큰아버지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셨다. 하지만 세 번째 선거에서 또 떨어지셨고 그 빚보증 때문에 집안 곳곳에 알 수 없는 빨간딱지들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그날 알았다.


우리 집은 망했다.     

 

 깜깜한 밤 엄마는 몇 가지 짐을 미리 옮겨 놓는다고 했다. 낮에는 동네사람 보기 창피하니 옮겨놓을 수 있는 물건 몇 개만 이사 갈 곳으로 옮긴다고 했다. 나는 곧 전학도 가야 하고 친구들과도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야 이년아, 야반도주할 작정이지? 내 돈 내놔. 돈 줄 때까지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아랫집 세 들어 사시는 아주머니가 엄마 앞을 가로막고 소리 지르셨다.  내가 알던 상냥한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삿대질하며 욕을 하셨다.

[야반도주]- 남의눈을 피하여 한밤중에 도망을 감. 

 

 엄마 아빠는 야반도주를 하실 생각이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야반도주라면 정말 몰래몰래 살금살금 도망가는 건데 그날 밤은 시끄러웠다. 엄마가 아랫집 아주머니한테 이년 저년 들어가며 주어야 할 돈은 무엇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단지, 늘 봄 같은 우리 집에서 어른들이 큰 소리로 거칠게 다투고 있었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엄마가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빠의 입에서 그런 나쁜 말이 나온 걸 나는 처음 목격했다. 그날 내 눈에 들어온 장면들기억들은 아직까지도 내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한다. 이제 이 집은 우리 집이 아니다. 따스하고 햇볕 잘 드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칠 수도 없고 아빠와 블루스를 출 수도 없다. 엄마가 꽃꽂이하는 모습은 다시 볼 수 있을까? 내 이층침대와 인형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호계동 우리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우리 엄마한테 왜 그래요.. 이러지 말아요. 제발” 아랫집 아주머니 앞에 서서 나도 매달려 울었다.





11살, 1993년 12월의 어느 추운 겨울


변변치 않은 가구는커녕 옷가지와 보따리만 들고 큰어머니가 하시는 안양식당 2층 구석 한편에 가림막을 쳤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여기서 살 거야"

방바닥은 차디찼고, 입에서는 김이 나왔다. 엄마는 전기장판 위에 이불 몇 겹을 깔으시고 그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으셨다. 난로를 켜 놓고 따뜻해 지기만을 기다렸다.


 나와 언니는 최대한 빨리 잠에 들어야 했다. 잠이 오지 않지만 자는 척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 있겠지.

 우리를 재우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막막한 앞날을, 쫓겨나듯 떠나온 집을 생각하며 얼마나 숨죽여 우셨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바느질, 미싱, 꽃꽂이, 지점토로 그 시대 주부로서 할 수 있는 부업은 다 해가며, 운전기사 남편과 한 푼 두 푼 모아 장만한 집 한 채가 하루아침에 내 것이 아닌 게 되었다. 아직 어린 두 딸들을 보며 얼마나 절망스러우셨을까? 고드름 얼은 천장에 천막을 겉대어 치고 낡고 허름한 식당 이층 한 구석에 이불만 깔아 놓고 얼마나 허탈하셨을까? 아빠는 처자식 먹여 살 걱정 떠안은 빚 걱정으로 얼마나 미안해하셨을까? 그날 잠든 어린 두 딸을 쳐다보시고 잠은 제대로 이루셨을까?


새어 나오는 울음을 참아내느라

휘몰아치는 원망을 눌러내느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붙잡아 내느라

얼마나 애쓰셨을까.

그때  엄마는 고작 서른다섯 살이었다.






얼마 전 엄마에게 어렵게 물었다.


엄마, 그때 기억나? 안양식당 이층에서 살 때.

엄마는 생각 외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럼, 제일로 어려웠을 때.  우리가 돈 꿔달라고 할까 봐 무서워 친척들 누구 하나 그림자 하나 비추지 않더라. 다 모른척했어. 제 살 거 하나 빼놓지 않고 그걸 다 보증을 서서 날리냐고 되려 뭐라고 했어. 내가 잘 살 때 해먹이고 도와줬던 식구들이 내가 어려우니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더라. 쌀 한 톨 보태주지 않았어. 아파 죽겠는데 천 원짜리 한 장이 없어서 약도 못 사 먹었어. 그래서 네 아빠랑 이 악물고 버텨냈어. 보란 듯이 일어선다고.'


빨간딱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드름이 나는 곳에서, 집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곳에서 먹고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난은 눈으로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엄마의 눈물과 무너지는 심정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안해 엄마, 그리고 정말 고마워.

그렇게 어렵고 힘들었는데 우리 키워내느라 고생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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