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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앙카 Jan 05. 2023

내 친구들은 아무도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았어(2)

시할머니와 첫날밤

나의  201호로 가는 길.

왜 하필 2층인 건지. 

여기는 엘리베이터 없는 5층짜리 기숙사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꼭대기층 끝방에 살았어야 한다.

할머니의 걸음 보다도 훨씬 느리게 최선을 다해 천천히 걸어본다.


옷은 잘 벗어 놨던가? 그럴 리가.

책상은 언제 정리했더라? 

펼쳐진 문제집은 공부하는 이미지로 괜찮을 것 같은데.

이불과 베개가 눈치 없이 나뒹굴고 있을지 모르겠다.

화장실 배수구에 뭉쳐있는 머리카락은?

하아... 망했다.


'들어오세요'


할머니의 시선은 현관 바닥을 향해 있었다.

정신없이 흩어져 있는 신발들 사이로 한 발짝 들어오셔서 

말씀하신다.

"현관문에서 들어오는 길이 깨끗해야 복이 들어오는 거다.

신발이 여기 있으면 복이 들어오다 막혀요"

할머니 손가락이 지시한 대로 주섬주섬 신발을 양쪽 끝으로 정리하고 복이 들어오는 통로를 만들어 둔다.

얼굴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복(福)은 현관부터 들어온다는 사실과

신발이 들어오는 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할머니의 눈동자가 방을 한 번에 훑고 지나간다.

계신 자리에서 3초 만에 스캔이 모두 끝났다.

할머니 이마 주름이 더 쭈글쭈글해 보인다.




"여기 앉으세요. 주스라도 드릴까요?"

널브러져 있는 옷을 이불 사이로 쓱 집어넣었다.

"따뜻한 물 한잔 다오."

커피포트에 생수를 붓고 버튼을 눌렀다.

물 끓이는 소리와 어색한 공기가 뒤섞여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할머니는 따뜻한 물 한 모금 드시고 먼저 침묵을 깨셨다.

"우리 지윤이는 어렸을 때부터 농구 밖에 몰라요. 요즘도 농구하지? 중학생 때는 NBA만 쳐다봤어요 "


74세 할머니가 23살 손주의 여자친구에게 평어와 존대를 섞어하신다. 사투리는 전혀 쓰지 않고 서울말을 천천히, 그것도 아주 품위 있게 하신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NBA라는 단어를 아시다니.  


"아파트 단지에 농구 골대가 있었어요. 농구한다고 한밤 중에 나가서 들어오지를 않아.  한 번은 누가 이 시간에 농구를 하냐며 남의 집에서 쫓아 나왔는데 그게 우리 지윤이었어요"  


방금 헤어진 손주를 떠올리시는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오신다.  애지중지 귀하게 키운 손주를 그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보통의 할머니다.


남자친구가 태어날 때부터 20년 넘게 키워온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졌다.

긴장해서 움츠렸던 어깨가 한결 편안하다.




할머니께서 씻기 시작하시는 물소리가 들렸다.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베개와 이불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남이 쓰던 베개는 좀 찝찝하게 여기실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부드럽고 깨끗해 보이는 수건을 꺼내 베개 위에 펼쳐 올렸다.


'할머니가 나오시면 타월을 드려야지'

양손에 타월을 들고 화장실 앞에 서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렸다.


"할머니, 타월 여기 있어요."

"어, 그래 고맙구나."



불은 꺼졌고 눈을 감았다.

할머니는 정말 손주방이 싫으셔서 내 방에서 주무신다고 하신 걸까? 좀 허름한 아파트지만 방이 세개인데?

정말 궁금하다.  내일 남자친구가 몇 시쯤 올 건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설마 혼자 발뻣고 편히 쿨쿨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따질까?

내 옆에 오늘 처음 본 남자친구의 할머니가 주무신다.

무사히 넘어간 것 같지만 실수한 게 없는지 처음 뵈었을 때부터 천천히 되새겨본다.  할머니가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하실까?

머릿속에서 혼자 말을 수없이 주고 되받는다

잠은 들 수 있을까? 이러다 늦잠 자면 어쩌지?

오늘은 밤이 길구나.



그 당시 74세 할머니가 지금 91세 나의 시외할머니가 되어 옆에 계신다.

남편은 말한다. 본인 친구들 선모, 주엽이, 배균이, 예원이, 신애 다 마음에 안 들어하셨는데, 딱 한 사람 나만 좋아하셨다고.


그날 베개 위에 깔아드린 수건이 마음에 드셨을까? 타월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여자아이가 마음에 드셨을까? 중국으로 유학온 촌티 풀풀 나는 모습이 강남아이들과 다르게 순박해 보이셨을까?  


할머니 전화다.

"네~할머니"

"내가 신세계 백화점에 왔어요. 인삼이 아주 좋아요.  주말에 천안 갈 때 어머니 하나 드리고, 하나는 너랑 지윤이 먹으면 되겠다. 받았다고 전화할 것 없다. 택배 아저씨가 어련히 잘 배달해 주겠어요."

"네~ 할머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



91세 고령의 나이에 할머니 혼자 마을버스를 타시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신다. 3살 어리다는 이웃집 할머니 보다 당신이 더 건강하다고 말씀하신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남편은 웃으며 할머니가 한창 펄펄 날아다니셨을 때 내가 봤어야 한다고 한다. 친구들은 할머니만 보면 무서워서 다 도망갔다고. 아무도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았다고. 정말 단 한 명도 안 왔다고.


간혹 내게도 쓰디 쓴 말을 하실 때가 있어서 상처도 받고 속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동네 호랑이 욕쟁이 할머니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등이 살짝 굽으신 손주와 손주며느리 손 잡고 걷는 게 편안하신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어주셨으면 하는 할머니다.


손주며느리가 준비한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시고 몰래 두고가신 봉투
사돈 건강 회복하시라고 보내주신 수삼과 백화점에서 급히 적으신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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