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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앙카 Dec 05. 2022

잔이 비워질 때까지만 솔직해져 볼게요

오늘의 와인-F 네그로아마로 2019

"Love weathers doesn't withers; Just like wine, the older, the stronger"

  – Falguni Jain

 사랑의 날씨는 시들지 않는다; 포도주처럼, 오래될수록, 더 강해진다




 어제는 외식을 했으니 오늘 저녁은 지난번 친정엄마가 사주신 돈육으로 김장김치와 보쌈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파, 마늘, 양파, 후추, 월계수 잎과 된장을 풀어 보글보글 육수를 끓여내고 고기를 넣으려는데 남편이 불쑥 나타나더니 보나카바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이 먹고 싶다고 한다.

 "나 지금 보쌈하려고 다 준비했는데?" 요리하고 있는 나를 제쳐두고라도 이 사람은 도대체 카드 값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제도 양꼬치와 훠궈로 4 식구 외식비는 10만 원이 넘었다. 누구는 외식하고 싶지 않아서 보쌈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다음 달 카드값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수 없었다. 돈 문제로 부부 사이에 다툼이 나는 현장만큼은 피하고 싶다. 아무리 다듬고 포장해 말한들 그에게는 날카롭게 들릴 수 있는 말이 될 수 있으니.


 뒤돌아 아이들에게 결정권을 떠 넘겼다. 큰 아이는 아빠는 어쩜 자기와 먹고 싶은 게 같냐며 싱글벙글 신이 났고, 엄마 눈치를 살피는 둘째는 엄마의 보쌈도 먹고 싶은데 오랜만에 보나카바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가 아주 조금 더 먹고 싶다고 한다. 당연히 아이들은 엄마 보쌈을 선택해 줄지 알았는데, 이노무 자식들은 도대체 중요한 순간에 아빠 편을 든다.


가스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덮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고기를 넣기 직전이었으니 고기는 살렸다.

에라이. 다음 달 카드값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분명 당신이 가자고 했어요. 나도 스테이크에 와인 좋아합니다.

사진출처:Pixabay


 그의 눈은 귀한 와인을 싼 값에 발견할 때 가장 빛이 난다. 와인샵에서  할인을 많이 할 때면 싼 값으로 비싼 와인을 사서 그의 와인바에 꼭꼭 쟁여놓는다.  물론 1-2만 원대의 데일리 와인도 늘 한가득 준비되어 있다. 우리 집에 누구를 초대해도 하나 꿀리지 않는 와인들이니 언제든 Gee bar는(남편이 붙인 본인 bar의 이름) 열려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그런 그의 값비싼 취미는 어느새 부부의 취미가 되었고 비슷한 취향으로 맞춰 살아가고 있다. 덕분에 와인을 느끼는 내 혀의 감각도 중간 이상이 되었다.   


 남편은 Gee bar에서 와인 두 병을 골라냈다.

"자기야, 이건 스페인 쉬라. 이건 이태리 뿔뤼아 지방 네그로아마로 100%. 어떤 게 마시고 싶어?"

선택받지 못한 나의 보쌈용 채소육수는 내일 저녁에 심폐소생이 가능할지, 그냥 다 버림을 받아야 하는 건지 머릿속에 채소육수로 한가득인데 스페인이든 이태리든 아무 상관없는 소리였다. "음...쉬라가 좋을 것 같아" 일단 대답은 한다. 너무 성의 없이 대답했나? 생각하지만 그는 내게 이태리 와인이 마시고 싶다고 말하라는 동의만을 구하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으니. 말을 바꾸어 그럼 이태리 와인이 좋겠다고 말한다.

결국 그가 테이스팅 하고 싶은 이태리 와인을 콜키지로 마시기 위해 신생아를 안듯 가슴에 소중히 품고 보나카바로 갔다.


깜깜해진 어둠 속에  화려한 조명과 잘 꾸며진 정원이 아름답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답답했던 가슴을 뻥 뚫어주었고

이틀 연속 외식비에 대한 부담, 식어있을 냄비 속 보쌈용 채소육수는 이내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콜키지 하겠다고 말해두고 메인 음식이 나오기 전 미리 와인을 오픈한다. 공기와 충분히 접촉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한다.  레스토랑 매니저는 이태리 와인을 쪼르르 따라주었다. 손목으로 잔을 가볍게 여러 번 돌리고 후각을 최대한 끌어내 와인의 향을 코로 한껏 들이마신다. 그리고 딱 한 모금만 머금어 입안에서 한 바퀴 두 바퀴 휘감아 준다.


 오늘의 와인 산 마르짜노 F 네그로아마로 2019 빈티지를 처음부터 끝 맛까지 있는 그대로 느낀다.


"와. 목 넘김이 엄청 부드러운데?  바디감은 묵직해. 마지막 끝 맛에 과일향이 풍부해서 입안에 싹 감겨. 과하지 않은 단맛이야. 와- 밸런스 짱인데?!" 나의 반응이 좋자 남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와인의 첫 모금을 공유할 때가 가장 짜릿하다. 나는 이런 맛인데, 자기는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하다.  그러고는 오늘 우리가 셀렉한 와인은 성공적이었다고 자축한다.   




 한 잔, 두 잔을 비워내니 분위기는 무르익어가고 레스토랑에 우리만 있는 것처럼 내 눈앞에 남편과 아이들만 보였다.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는 남편의 눈빛도 반짝인다. 재잘재잘 무슨 말을 했는지 한참을 웃었다.  요즘 사소한 것에 생각이 부쩍 많아진 내 모습이 낯설었는지 왜 갑자기 브런치에 지원했냐며 물어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글짓기 대회, 백일장 엄청 나갔었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진심을 다해 썼어. 첫 번째 글짓기 주제도 기억나.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근데 단 한 번도 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 초등학교 내내 그랬나 봐. 그래서 글 잘 쓰고 상 받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어. 동경의 대상이었지. 나에게 없는 재능과 감각을 가진 아이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말했지? 우리 학교가 동아리가 엄~청 많았다고. 고1 때 동아리 홍보한다고 쉬는 시간마다 교실로 선배들이 들어오는데 문예창착동아리 '한울타리'가 들어오는 거야. 근데 오빠들이 엄청 잘생긴 거야. 말 잘하는 회장 오빠, 곰돌이처럼 생겼는데 눈웃음 쩌는 오빠, 최고 꽃미남 오빠(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생겼어), 피부 까마잡잡 상남자 오빠까지.. 문예부에 오빠들이 언니들보다 더 많아~. 그래서 당장 지원했지. 하하하. 근데 나 말고도 여자애들 거의 다 지원했어~ 진짜야. 그래서 고1, 고2 열심히 시도 쓰고 소설도 썼지. 릴레이 소설 쓰는 게 제일 재밌었어."남편은 나에게 브런치에 지원한 이유를 물었는데, 아뿔싸. 웬 글짓기 대회에서 매번 떨어진 고백에 지나간 오빠들 타령인지. 잘생긴 오빠들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오빠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야기까지는 안 했다. 잘 참았다.

  와인 탓이다. 아니, 와인 덕분이다.

 이게 내가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다. 와인을 마시면 향에 취하고 맛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다. 말랑말랑해진 나의 마음이 속 깊은 이야기를 솔직히 하나 둘 꺼낼 용기를 준다. 그리고 순간 뜨끔했을 나의 마음도 귀엽게 알아차려줄 남편은 연애 6년, 결혼은 12년. 합해서 18년 나의 반려자다. 그와 함께하는 와인은 언제나 맛있다.

 

  하루 지나 뒤늦게 남편에게 물었다.

 "어제 내가 보쌈하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나가서 외식하자고 했어? " 그는 스트레스에 요 며칠 계속 속이 좋지 않았고 정말 오랜만에 마시고 싶은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과 오랜 시간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현실적인 아내와 사는 낭만적인 남편은 와인을 마시는 시간 동안은 아무 걱정 없이 우리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나 보다.  


                                                        사진출처: up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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