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라는 말랑한 제목에 이끌려서 사게 된 책이다. 서점에서 책을 찾아 표지를 봤을 때 제목이 주는 느낌과는 다른 무표정한 소년의 눈빛에 먼저 눈이 갔다.
뭘까, 이 서늘한 느낌은. 슬픈 것 같으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듯한 무심한 표정이 볼 수록 섬뜩하면서도 슬프게 다가왔다.
이 책의 제목에서 <아몬드>는 고소한 맛이 나는 '아몬드'가 아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아몬드'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amygdala)',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아몬드> 29쪽
나는 머릿속에 '아몬드'라는 편도체가 있는지도 몰랐다. 바로 이 아몬드는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빨간불이 들어온다고 한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 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의 주인공인 '선윤재'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공포도 느끼지 못하니 뜨거운 주전자에 손을 데이고도 또 만지거나 슬프거나 기쁜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머릿속의 아몬드는 어딘가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아몬드> 29쪽
머릿속의 '아몬드'인 편도체의 크기가 작으면 공포를 느낄 수 없거나 주인공 윤재처럼 이렇게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공감능력이 아예 없는 것이다. 의사들은 그에게 '감정 표현 불능증, 다른 말로는 알렉시티미아'라고 진단했다.
안타깝게도 윤재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증상을 겪었다. 학교 생활이며 단체 생활에서 윤재가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당연히 윤재 엄마의 바람은 윤재가 그저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윤재에게 끊임없이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매뉴얼처럼 알려주며 연습시킨다.
차가 가까이 온다>> 몸을 피하거나, 가까워지면 뛴다. 사람이 다가온다>> 부딪히지 않도록 한쪽으로 비켜선다. 상대방이 웃는다>> 똑같이 미소를 짓는다.
*참고사항: 표정의 경우, 무조건 상대와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편함
<아몬드> 33쪽
이러한 사소한 상황까지 매뉴얼이 필요할 정도니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했을까. 또한 수많은 변수에는 또 어떻게 대응했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윤재를 그저 '또래에 비해 겁이 없고 침착한 아이'로 좋게 생각하는 엄마와 '예쁜 괴물'이라고 부르지만 사랑을 쏟는 할머니가 함께 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생계수단으로 운영하는 헌책방을 윤재는 편안해했고, 희한하게도 먹고 살만큼 책이 팔렸다는 사실이다.
나도 그곳이 편안했다. 다른 사람들의 언어로는 '좋았다'라거나 '맘에 든다'가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단어로는 '편안하다'가 최대치다. 정확히 말하자면 헌책의 냄새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아몬드> 49쪽
하지만 윤재의 이런 편안함은 열여섯 살 크리스마스이브에 깨져버리고 만다.
윤재의 생일이기도 한 크리스마스이브에 외식을 하기 위해 냉면집에 갔다가 '묻지 마 폭행'을 하는 어떤 남자에 의해 할머니는 세상을 뜨나고 엄마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가족이 있어도 '감정표현 불능'인 윤재가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은 세상에 결과적으로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병원에는 매일 갔다. 엄마는 가만히 누워서 숨만 쉬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있던 엄마는 얼마 뒤에 6인실로 옮겨졌다. 나는 매일같이 가서 엄마 옆에 앉아 햇살을 쬐다 왔다. 의사는 냉정히, 깨어날 가망이 없다고 했다.
<아몬드> 68쪽
세 사람이 살았던 집은 적막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쨌든 엄마는 병원에 살아있고 할머니의 사망 보험금이 나와서 윤재가 당장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 또한 엄마가 운영하던 '헌책방'의 책들이 윤재에게 위안을 준다는 것.
그리고 책방의 2층 빵집 아저씨인 '심 박사'가 윤재의 상황을 엄마에게 평소 들어서 알고 있다는 것 등이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엄마가 혹시나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잘 부탁한다고 자주 말했었다. 우린 꽤 친한 편이었거든. 네 엄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었지. (중략)
-그럼 이렇게 하자. 가게를 계속하렴. 이 건물의 주인은 나란다. 아르바이트로 계속 일하면 내가 월급을 주마. 생명보험금은 네가 대학에 가거나 중요한 일이 생길 때 쓰고, 생활비는 일단 아르바이트비로 충당하렴.
<아몬드> 79,80쪽
엄마의 친구이자 빵집 주인이며 건물주인 심 박사의 제안에 윤재도 동의한다.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원하는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윤재는 고등학교에도 진학하고 힘들지만 학교생활에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가 같은 반에 전학 온 윤이수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얽키게 된다. 어린 시절 이수는 엄마와 놀이동산에 놀러 갔다가 엄마를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기자였던 이수의 엄마는 아들을 잃어버린 스스로를 자책하며 끝내 병을 얻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이수의 아빠는 십삼 년 만에 보호시설에서 '곤'이라 불리며 살고 있는 이수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 이수와는 너무 다른 불량한 느낌의 '곤'을 죽음을 앞둔 아내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이수의 아빠는 윤재에게 대역을 부탁하게 된다. 그리고 이수 엄마는 윤재를 보며 안도하며 숨을 거두게 된다.
문제는 이수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곤'이 자신의 대역을 한 윤재를 보게 되고 반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비뚤어지고 불량한 '곤(이수)'는 학교에서 윤재를 괴롭히기 시작하며 두 사람은 인연, 혹은 악연을 이어가게 된다.
<아몬드>책 뒷여백에 써놓은 메모다.
책 속으로
48. 그건 작가의 깜냥이 아닌 거라고 했다. - 이미 시간의 냄새가 밴 책들.
119. 얘도 입이 있어요. 130. 난 누군가를 쉽게 재단하는 걸 경계한단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 네 나이 때는 더 그렇고.(심 박사)
171.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에서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192. 그래도 헌책은 좀 낫네. 종이 냄새도 더 생생해. 낙엽 냄새 같기도 하고.(윤재의 여자 친구, 도라) 252.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258.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과연 진짜 괴물은 누구일까?
곤이가 아무리 윤재를 괴롭혀도 윤재는 끄덕하지 않는다. 끝내 반 학생들 모두가 곤을 외면하게 되었을 때도 윤재는 곤을 있는 그대로 대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와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괴로운 곤은 서서히 서로에게 의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지 않는 곤이가 윤재의 헌책방까지 찾아오는 상황은 감동적이다.
또한 감정이 없는 윤재가 도라라는 여자 친구와 소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뭉클하게 한다. 하지만 친아빠조차 곤의 비뚤어진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자 곤은 힘 있는 깡패조직을 찾아가고야 만다. 과연 곤은 괜찮을까?
그를 멀고 무서운 곳으로 직접 찾아가는 것은 결국 '윤재'다. 공감 능력이 없지만 온몸을 다해 친구를 구해내려는 윤재, 감정이 있어서 상황은 다 알고 있지만 외면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과연 진짜 괴물은 누구일까? 작가는 묻고 있는 듯하다.
악의 소굴 같은 곳에서 목숨 걸고 곤, 이수를 구해낸 윤재. 그에게 이수는 진심을 다해 쪽지로 마음을 전한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
센 것 만이 강한 것이라 믿어왔던 이수가 윤재에게 자신의 깊은 속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은 먹먹한 감동 이상이다.
또한 마지막에 윤재에게 깜짝 선물이 있다.
그것은 책으로 확인하기를~!
<아몬드> 손원평 작가
<아몬드>를 쓴 손원평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본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고 내가 그리 좋아하는 <씨네 21>에서 영화평론상도 받았다. 또한 시나리오도 쓰고 다수의 단편영화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한 경력자다.
이 책의 주인공인 '선윤재'캐릭터가 새롭고 독특한데 상황도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이야기의 속도감도 있고 문체도 간결하다.
책의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을 보면 손원평 작가가 아들을 낳고 아이가 4개월이던 2013년 8월에 초고를 한 달 만에 썼다고 한다. 나도 비슷한 시기에 직접 현장 취재도 다 따라다니고 구성이며 대본을 쓰면서 바쁘게 보냈더랬다. 하지만 이렇게 걸출한 작품 한 권을 완성했다니, 더 놀랍고 대단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말
이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이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큰다 해도? 그 질문에서 출발해 '과연 나라면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할 만한 두 아이가 만들어졌고 그들이 윤재와 곤이다. (중략)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