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라이팅 클럽>을 읽고

by 책벌레 잠잠이

여름 더위가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하자마자 남도행 기차에 올랐다. 당분간 일도 쉬기로 하고 가족들로부터도 잠정적으로 일주일치 자유를 지원받았다. 매일 아침부터 나는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도 있었으며 늦은 밤까지도 쓰고 싶은 글을 원 없이 쓸 시간을 얻었다. 그런데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김 작가와 영인이 계동의 글짓기 교실을 열 집을 구하고 깨끗하게 치우기를 항복! 했던 것처럼 나도 “항복!”이라고 외치고 심정이었다. 그리고는 가족이 득시글거리는 시골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 책 <라이팅 클럽> 단 한 권을 챙겨 들고서 말이다. 그것은 뭔가를 쓰겠다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표였다. 아니, 내게도 ‘라이팅 클럽’이 절실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장장 네 시간이나 걸리는 꼬불꼬불 멀기도 한 이곳에 오는 내내 <라이팅 클럽>을 읽었다. 예상한 것처럼 할아버지부터 아이들까지 3대가 모여 왁자한 시골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없었다. 방에서도 대문 밖 저 끝까지 초록으로 펼쳐진 논과 낮은 산은 평화로웠으나 마당 안쪽은 늘 부산스러웠다.


밤사이 훌쩍 자라 있는 풀을 베고 있는 아버지를 보거나 고추니 오이를 따거나 마늘을 까는 어머니를 보면 글 쓰는 게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얼큰한 수제비를 뜨겁게 끓이거나 오이를 숭숭 썰어 넣은 시원한 냉면을 상에 올렸다. 그러면 우리 가족은 둘러앉아 막걸리를 따라 마시며 ‘위하여’를 외쳤다. 설날 아침에도 어머니인 김 작가와 단둘이 분식집에서 떡국을 사 먹어야 했던 주인공 영인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러다 여름 땡볕 사이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면 나는 하염없이 쓸쓸한 마음이 들곤 했다. 계동의 글짓기 교실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한적한 시간에 영인이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의 시간>을 읽곤 했던 것처럼 나는 <라이팅 클럽>을 읽었다. 그중에서 나를 제일 처음 벅차게 만들었던 것은 영인이 처음 ‘글쓰기 모드’를 느끼는 순간!


‘글을 쓰고 싶은 순간엔 그 특유의 모드가 있는 것 같다. 그 모드에 접속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모드가 바뀌는 순간도 있다.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처음 글을 쓸 수 있는 상태에 있다고 느꼈던 순간.’

아, 얼마나 설레는 순간일까. 얼마나 충만한 기분일지. 내가 마치 영인이 된 양 ‘홧홧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자신의 엄마를 김 작가라 부르는 주인공도 결국엔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평생을 작가 지망생으로 궁핍하게 살면서도 ‘보통의 엄마들이라면 떡볶이 가게나 옷가게’를 할 작은 가게에 글짓기 교실을 여는 엄마를 미워하고 주변의 글 쓰는 나부랭이들을 증오하던 그녀에게도 글 쓰는 일은 운명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글은 쉽사리 써지지 않는다. 영인도 ‘글을 쓰기는커녕 책도 읽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고 괴로움을 토로한다. 시골로 도망 오기 전의 나와 같은 상태. 하지만 영인은 ‘배고픔과 분노’를 원동력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동거했던 B와 헤어지기 직전 일주일간 쓴 소설을 들고 계동의 커피숍으로 J작가를 찾아간 영인이 들은 얘기는 어떤 예언 같다.


“글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줄 모를 거야. 작가들이 진실한 문장 하나를 갖으려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는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채 그녀의 삶은 신산하기만 하다. 다행히 영인은 위태로운 삶을 꽉 붙잡고 놓지 않는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간 미국에서 혼자가 됐어도 영인은 꿋꿋하게 일하고 글을 쓴다. 내가 두 번째로 좋았던 부분은 영인이 전 남편에게 선물 받은 야외용 튜브에 들어가 책도 읽고 마음껏 글을 쓰게 되는 장면이다.


‘뭔가 성취감이 느껴지면 차갑게 식은 피자 한쪽을 들고 야외용 튜브 속으로 들어가 내가 쓴 걸 큰 소리로 읽었다. 글이 마음에 안 들면 튜브 속으로 휙 던지며 “쓰레기야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 멋지지 않은가. ‘쓰레기야, 꺼져’라니! 월요일부터는 토요일까지는 네일숍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온통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내는 그녀가! 그리고 운명처럼 영인은 이국의 땅에서 ‘핵켄색 라이팅 클럽’을 시작하게 된다.

그즈음 영인인 김 작가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게 되고 모녀는 오랜만에 병원에서 상봉하게 된다. 한데 뇌종양으로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도 김 작가는 뭔가를 쓰고 또 쓴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김 작가는 침대의 머리 쪽을 높이 세운 채 등을 기대고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앞에 쓴 종이를 옆에 놓고 자기가 쓴 것들을 확인하기도 하고 종이를 높이 쳐들고 뒤집어보고 또 바로 놓고 읽기도 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 고백건대 나는 이때야 비로소 김 작가를 좋아하게 됐다. 아마 영인도 그렇지 않았을까. 낯선 땅에서 계동의 글짓기 교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었던지를 느꼈던 것처럼, 글을 쓰느라 자신에게 소홀했던 ‘김 작가’가 병상에서도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게 되지 않았을까.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갔던 김 작가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영인은 다시 김 작가와 함께 할 거처를 계동에 마련한다. 오래전 글짓기 교실을 처음 열었을 때만큼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 곳. 그곳에 음식을 배달하러 온 이들은 늘 묻는다. “여기 뭐 하는 데예요?” 그럼 영인은 대답한다. “라이팅 클럽요.” 이 대목은 읽을 때마다 왠지 흐뭇하다.


그러던 크리스마스 오후, 뜻밖의 선물이 이곳에 당도한다. 김 작가와 영인이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 시간에 걸려온 전화 한 통. 그것은 김 작가와 영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소식이었고 내게도 너무 기쁜 소식이었다. 한 신문사가 주최한 문예공모에 김 작가가 당선된 것이다. 그리고 라이팅 클럽 올드 멤버들과의 소박한 축하 파티에서 그들이 고량주로 건배를 할 때 나도 막걸리 잔을 높이 치켜들고 “브라보”를 외치고 싶었다.


평생을 ‘작가 지망생’으로 살았던 김 작가는 그 해 겨울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작가’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작가는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 사는 것’인지로 모른다. 그렇다면 글만을 쓰기 위해 시간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머니가 다듬어 놓으신 마늘을 다듬고 빻으며 나는 깨닫는다. 편하게 누리고 있었던 자유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음을. 당연하게 먹었던 음식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있었음을. 그래서 영인의 담담한 말투가 내게는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두 식구의 생계를 위해 여전히 돈을 벌었고 <노동 일기>를 읽었다.
그러나 소설은 쓰지 못했다.’


하지만 난 안다. 그녀도 결국에는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아니 이미 작가로 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도 그녀만큼 이나 김 작가의 편지가 감동적이었다.


“너는 오후 세시에 태어났어. 오후 세시는 누구나 후줄근해지는 시간이지. 매일 오후 세시가 되면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셔. 그리고 ‘난 지금 막 세상에 태어난 신삥이다.’ 생각하며 살아. (중략) 하루에 한 번씩 그걸 생각해야 한다.”


고단하고 나른한 시골의 여름 한 낮은 정말 후줄근하게 느껴진다. 그때마다 내리던 소나기처럼 내 정신을 맑게 해주는 구절. 내 인생의 시간이 참 후 줄 하게 느껴지던 순간, 참 상쾌한 기분을 맛보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크리스마스 오후에 김 작가와 영인에게 날아든 놀라운 소식처럼 <라이팅 클럽>은 내게 한여름에 찾아온 뜻밖의 크리스마스였다고 나 할까.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16회 ‘우수문학도서 독서감상문 대회’ 장려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독서감상문 대회 수상작

#라이팅 클럽 독서감상문


책 뒷 여백에 네 페이지에 걸쳐 메모가 되어있는데 글씨가 흐릿해서 사진에 잘 안 찍힌다.

책제목: 라이팅클럽

작가: 강영숙

출판사: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