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골목을 넘볼 수 있으려면

<두산인문극장 강연: 아파트는 골목이다> 임형남, 노은주 건축가

by 별별


오래된 도시의 가치

종묘 앞 세운 상가가 헐리고 녹지 복원을 명목으로 하는 사실상 아파트 설립계획이 가까운 수년 내 실현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에도 무사히 명맥을 유지한 길이 전쟁통도 아닌데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세계적으로 600년 된 수도는 5개 이내일 뿐인데, 우리는 왜 이리도 오래된 도시의 가치를 모르는 걸까?


땅의 문맥을 읽어야

수서 전도는 250년 전 서울의 지도다. 대로임에도 구불구불한 길과 물길을 그려놓은 것은 격자형 그리드를 표현한 다른 도시의 지도와는 구별되는 우리만의 독특한 정서다. 그토록 우리나라는 땅의 문맥을 이해하는 게 중요했다.


KakaoTalk_20190625_130137407_05.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공간은 시간을 담고 있다

건축가는 겸재의 그림을 보며 골목을 답사했다. '백세청풍'이 새겨진 돌을 찾아 몇백 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동네가 서로 일치하는 걸 찾아내는 것은 기쁜 일이다. 청운동, 수성동, 옥인동을 돌아다니며 마치 고고학을 하는 학자처럼 옛날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골목이다

골목을 답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골목을 거닐면 그 안에 있는 시간을 읽는 것이다. 건축가는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직접 살고 싶은 집을 찾아서 살아보기도 하고 그 동네를 자주 드나들면서 동네 주민들에게서 옛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골목 사람들의 일상, 생각은 곧 역사였다.


건축은 사람이다

체부동 한옥집 할머니는 혼자사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었을 때 "나는 집이 있는데 왜 무섭냐?"고 반문하셨다. 그 할머니에겐 집은 식구나 다름없었다.


골목 본능

옛날에는 한 집에서 파전을 하면 온 동네에서 그 냄새를 맡았다. 아이들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놀았고 임형남 건축가는 지금도 어느 골목을 들어가든 빠져나올 수 있는 길눈을 익혔다. 빼곡한 골목이던 을지로 서울토박이 그는 골목에 대한 감각이 여실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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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과연 공동체인가

옛 골목이 공동체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아파트는? 공급자 중심, 자동차 위주라는 점에서 절대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아파트는 배경이 되어 버렸다

이제 아파트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에서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곳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도시에 보톡스를 주입했네

노은주 건축가는 은평뉴타운 등의 도시 계획을 보면서 이것은 마치 도시가 성형수술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골목은 없애고 온통 큼지막한 대로와 아파트 단지로만 간단한 구조로 되어 버린 지금, 그 모습은 좋아졌으나 결코 웃을 수 없는 웃픈 상태다.


서울의 좋은 점은 복잡한 점

하늘이 안 보이는 벽들, 간판들, 이것은 마치 만다라와 같았다. 모든 언어와 색깔이 있고 소리는 시끄러우며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이토록 복잡하니 좋지 아니한가.


KakaoTalk_20190625_130137407_16.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학교, 도서관, 군대의 공통점은?

이들은 모두 통제가 쉽도록 효율적으로 설계된 공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아파트도 이에 못지 않다. 심지어 아파트 내부에서조차 거실을 중심으로 모든 방이 붙어있다.



아파트를 규제할 수 없으니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사용자들이 아파트에 대해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공급자 중심인 아파트는 결코 천정을 높일 수 없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들끼리의 간격을 넓히는 것도, 수요자인 우리가 목소리를 내고 개선의지를 드높여야 한다.



욕망을 부정할 수 없으니

사라져가는 것들을 모두 부숴버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개선하면서 지켜나갈 것은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30년만 지나면 부리나케 재건축할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은 보수를 하고 생활의 편리를 위해 일부 보수를 하면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KakaoTalk_20190625_130137407_08.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강연이 끝나고...

건축가와 함께하는 골목 산책


강연이 끝나고 나서, 따로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산책코스가 이어졌다. 강연에서 말로만 듣던 골목길을 직접 임형남, 노은주 건축가와 함께 걸어보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두산아트센터에서 나와 먼저 종묘 맞은 편 세운상가 옥상에 올랐다. 널찍한 종묘와 그 앞에 종로를 보며 옛날 옛적 피맛길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곳 세운상가를 비롯해서 주변 골목골목은 곧 도시개발계획으로 곧 없어질 것이라 한다. 수많은 가게와 집들 그리고 골목들... 이제 사라질 것들이라 생각하니 더이상 그림의 배경처럼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았다. 풍경을 눈에 꾹꾹 눌러 담으며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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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주변 풍경. 이제 곧 왼쪽과 같은 집들은 사라지고 높은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들어설 것이다.


세운상가에서 나와 청계천 옛 효경교가 있는 곳까지 '효경다리길'로 불리는 길을 걸었다. 옛날 임형남 건축가가 그린 그림과 똑같은 상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옛날 사진과 비교해 보면서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을 찾아보는 게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듯한 재미가 있었다.

20190624_180442_HDR.jpg 왼쪽으로 난 길이 '효경다리길'이다.


중간에 '옥방길'을 만나 예지동을 가로질러 걸었다. 주로 음향, 배터리 등 전자 관련 기기의 판매상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기존 한옥에 차양을 씌우고 증축, 개조하면서 본래 건물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지만 일부 아직도 처마와 기둥이 남아있는 곳들이 있었다.

20190624_181422_HDR.jpg 돈방석 간판 뒤로 보일 듯 말 듯 기와 지붕이 보인다. 처마를 개조했다.


마지막으로 '시계골목길'이다. 옥방길에서 다시 청계천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모두 1천 개가 넘는 시계 관련 상점이 있는 곳이라 한다. 이곳에는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건축물이 한 데 모여 있는지라 건축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20190624_182010_HDR.jpg 서울센타 건물이 1960년대, 그랜드 백화점 건물이 1970년대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20190624_182201.jpg 웨딩프라자 건물은 1980년대 건축 양식으로, 세 건물이 모이니 건축의 역사가 보인다.


순식간에 한 시간이 지나갔다. 평소에 청계천이나 종로 큰 길을 걸으면서 이 골목길을 지나다닐 생각도 하지 못했던 터라 골목길이란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막상 걸어보니 마치 구멍가게에 온 것처럼 재미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공간, 가게, 건물들이 정말정말 많았다. 오늘 함께한 산책이 아니었더라면 이 길이 그토록 오래된 길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젠 골목길을 다니며 눈에 보이는 것마다 반가워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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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까지나 이 길을 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곧 있을 세운상가 주변 도심재개발사업으로 이들 길은 곧 없어질 운명이다. 이런 역사적 가치가 높은 수백 년 된 옛 골목길의 보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길은 곧 길을 만들고 걸어온 사람들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길이 없어진다는 것은 역사가 사라진다는 뜻일 테다. 우리는 길을 지켜나가기 위해, 즉 역사를 지켜나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 것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라도 이 길이 명맥을 보전했으면 좋겠다. 나는 머릿속으로 걷고 또 걸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엔 여기가 무슨 길이었어. 라고 누군가에게 얘기해줄 수 있는 지도가 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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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에 이은 골목 산책까지... 내 주변을 돌아보고 골목길에 얽히고 섥힌 우리네 삶을 돌아보고 수 백년 전 골목을 상상하며 우리의 겹겹이 쌓인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공간은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란 건축가의 말씀이 귀에서 맴돌았다.



KakaoTalk_20190625_130137407.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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