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의 미래는 꿈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두산인문극장 강연: 아파트는 미래다> 강재호 교수

by 별별
공간은 우리 정체성의 문제다
도입은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미래의 공간을 상상한 영상이었다. 문경원, 전준호가 참여한 <축지법과 비행술> 이 그것이다. 미래의 집, 거대한 창밖으로 어느 풍경이 보이고 그것은 외부인지 내부인지 알 수가 없다. 혼자서 지내는 줄로만 알았던 인물은 알고 보니 CCTV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질문은, 외부와 내부는 무엇으로 구별되는 것인지, 우리의 존재는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지 아니면 타인의 시선으로 형성되는 것인지 등이다. 그리고 이 영상은 공간의 문제는 우리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강연에서 ‘도시인은 영혼의 노숙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영혼의 노숙자란 집은 있지만 정주할 수 없는, 항상 불안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영혼을 말한다. 이것은 도시인의 기본적인 정서다. 그렇다면 수많은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아파트는 영혼의 노숙자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도시의 원형의 탐구 = 아파트 미래의 상상


이미 아파트는 현재다. 90%의 도시화를 이룰 것이라고 예견되는 지금, 우리는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 현재의 공간에 대한 합리화가 필요하다. 현재는 과거의 미래였으므로, 과거 도시의 원형에 대한 고찰에서 아파트의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다.


강재호 교수는 20세기 초 베를린과 파리를 중심으로 도시 문화를 탐구했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통해 아파트를 접근한다. 벤야민은 파리를 19세기의 수도라고 부르며 여섯 가지 주제로 탐험했다. 아케이드, 파노라마, 세계 박람회, 인테리어, 길, 공동체가 그것이다. 도시문화의 원형에 대한 연구를 함으로써 이후에 펼쳐지는 아파트의 미래를 좀 더 잘 알 수 있다.



먼저, 아케이드. 유토피아로서의 아파트


아케이드는 흔히 오늘날 재래시장의 현대화를 도모한 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러한 아케이드가 처음으로 시도되면서 공공장소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외부와 내부, 낮과 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아케이드는 샤를 푸리에가 집단 주거 계획을 구체화시킨 ‘팔렌스테리’의 재현이었다. 팔렌스테리는 생활공간, 중앙 공간, 이익창출 공간으로 나누어 자본주의적이지만 또한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를 구현한다. 푸리에는 이러한 집합적 주거 공간을 통해 인간의 열두 가지 정념(오감, 4가지 감정-우정, 야망, 사랑, 가족주의, 3가지 역학-음모, 혼합, 변덕)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였다.

KakaoTalk_20190625_130411733_08.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한편 르 꼬르브제는 1922년 초고층 건물 집합체인 ‘빛의 도시’를 상상하고 도시 자체를 근본적으로 디자인하려는 야망을 꿈꾼다. 즉, 푸리에의 수평적 공동체로 상상된 아파트는 르 꼬르브제에게서 수직적 공동체로 재현된 것이다.

1967년 한국에서는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가 이러한 유토피아로서의 아파트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복합공동체 세운상가는 당시 서울에서의 미래 아파트의 표상이었다. 거대한 중정이 있는 이곳은 아케이드와 다름없으며 집단 거주지 및 상권을 체계적으로 구상하여 초호화 미래형 건물이었다.


20세기에는 끊임없이 이상적인 공동체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공동체 공간은 배제, 배타적이거나 정 반대로 유기, 합동을 지향하게 된다. 강재호 교수는 묻는다. 과연 과학 기술로 합리성과 효용성을 추구하여 계획적으로 조성한 공간은 완벽히 실현될 수 있을까?


정념을 구체화하고 공간을 분리하고 철저하게 인간을 공간 속의 부품처럼 배치하려는 시도는, 그리하여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유토피아적 세계관 속에서 실현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유토피아로 남게 되었다.



두 번째, 파노라마. 스펙터클로서의 아파트


로버트 바커는 1792년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며 모든 경치라는 뜻의 ‘파노라마’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파노라마는 거대하고 압도적으로 경치를 보고 실제와 가상의 구분을 없애 우리의 공간지각을 바꾸게 된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왜냐하면 파노라마는 ‘공간의 하이라키(계층구조)’를 없애 시각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는 공연장에서 좌석에 따라 펼쳐지는 시각의 차별을 공간 계층구조의 예로 들었다.)

KakaoTalk_20190625_130411733_13.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그런데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은 이러한 파노라마를 역으로 이용하여 오히려 시각적인 규율을 만들어 낸다. 파리를 예로 들면, 골목 시가전을 없애기 위해 모든 도로를 개선문을 중심으로 뻥 뚫어버렸는데 이로써 권력자가 파리 시내 전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각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파노라마가 파놉티콘에서는 시선의 권력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파노라마는 곧 파놉티콘임에 다름 아니기에 이는 아이러니다.


현대인들은 경관을 더 멀리서 보고 다각도로 볼 수 있게 되면서 점차 파노라마적 도시경관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드론, 인공위성으로 위에서 보는 아파트의 풍경은 반복적, 체계적 배열구조를 넘어서 어떤 기하학적 문양 같다는 느낌을 준다. 미래도시를 그릴 때 클리셰처럼 반복되는 드넓은 도시빌딩의 향연은 이런 파노라마를 잘 보여주는 예다.



셋째, 세계 박람회. 이벤트로서의 아파트.


1851년 영국이 세계박람회는 메가 이벤트였다. 과학기술의 진보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1937년 파리 엑스포를 위해 파리에는 에펠타워가 건설되었다. 도시는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정비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올림픽 등이 일어나는 세계 각국에서 전개되었다. 민족, 국민이 집합적 주체가 되어 건설한 잠실의 올림픽 선수촌은 그 대표적인 건물이다. 1970~80년대 강남이 개발되고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국가적으로 부를 창출하여 물적 토대까지 마련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벤트와 물적 토대로 사람들은 이런 도시에 편입되기를 꿈꾸고 이것은 아파트에 대한 욕망으로 가시화된다. 도시개발, 아파트 건설은 곧 기술의 진보를 알리는 메가 이벤트였고 현대인들은 이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을 보인다.



넷째, 인테리어. 정상가족을 위한 아파트.


아파트의 실내는 정형화돼 있다. 거실을 중심으로 부엌, 안방, 그리고 자녀방이 있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통상 4인 가족을 위한 공간이 아파트의 보편적인 형태란 것은 이러한 가족을 ‘정상 가족’으로 본다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길. 유동하는 아파트.


파노라마의 등장으로 걷기는 몸과 공간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했다. 공간은 몸이 먼저 반응하고 감정과 정서가 변화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길에서 다른 이들과 만나고 공공장소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공간에 대한 탐구는 인간과 공간, 인간들 간에 상호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이것은 곧 정체성의 문제다. 아파트에 대한 탐구는 인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좁은 골목길이 있던 동네는 점점 재개발로 사라지고 대신 아파트 단지의 통로로 치환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공간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지속하지 못하며, 결국 아파트는 비장소, 탈장소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여섯째, 공동체. 비장소로서의 아파트.


강재호 교수는 묻는다. 과연 아파트는 공동체라 할 수 있는가? 아파트는 도시를 형성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도시의 특질들을 모두 종합한다면, 관점이 스펙터클화 되고 중산층 욕망의 공간이며 통로가 되었다. 이는 곧 현대의 아파트나 다름없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예로 든다. 남의 집 짖어대는 개 때문에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던 주인공은 그 개를 처분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심각한 이기적인 개인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파트 주민들의 시선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개인이 공동체와 갈등하며 아파트 속에서 어떤 식으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KakaoTalk_20190625_130411733_07.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꿈같은 계획 / 미완의 계획 / 무계획의 유토피아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도 있는 아파트의 미래. 강재호 교수는 오늘날 한국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질 가능성을 알아보자고 말한다. 교수님의 강의를 종합해 볼 때, 과거와 현재 속에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세 가지 사례를 정리해 볼 수 있었다.


팔랑스테르 - 한낱 꿈같은 계획

'팔랑스테르'는 앞서 언급했던 푸리에가 고안한 이 계획적인 집단 공동체이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양식을 열두 가지나 세분하고 공간적으로 철저하게 집단화시키고자 했던 이것이야말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전형이다. 하지만 감히 실현되지 못했고 인간의 머릿속에서 구상되기만 했던 하나의 가능성이었을 뿐이었다.



폰테 시티 - 미완의, 불운의 계획

'폰테 시티'는 실제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미완의 건축물이다. 요하네스버그는 아프리카에서 최고층 주상복합건물을 건축하려고 시도했다. 계획은 창대했으나 끝은 좋지 못했다. 어찌 된 일인지 도시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기둥으로 우뚝 솟은 멋진 외관의 아파트는 거대한 원통 모양의 쓰레기통과 다름 아닌 곳이 되어 버렸다. 도시의 빈민이 살면서 온갖 범죄의 온상이 되어 버린, '슬럼화'의 표본이 되었다.



토레 다비드 - 무계획이 이루어낸 유토피아

한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건설된 '토레 다비드'는 좀 특이하다. 본래 금융 센터로 조성되기 시작했지만 자금난으로 공정의 90%가 마무리된 상황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텅 빈 건물은 노숙자들이 점거하기 시작했고 세계 최대의 무허가 점거 주거지가 되었다. 하지만 노숙자들은 이 건물에서 식수와 위생, 보안, 종교, 정치, 경제적 활동을 이루어내며 자생하는 그들만의 사회를 이룩해 냈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집단 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이러한 사례들을 살펴볼 때, 인간은 집단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끊임없이 계획하였고 그 계획은 무척이나 철저히 통제되고 구체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실현된 적은 드물었으며, 아니 실현 불가능했다. 오히려 '토레 다비드'의 사례와 같이 본래의 계획과 달리 우연한 계기로 유토피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세상은 인간이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때론 전혀 의도치 않게 일이 흘러가버려 또 다른 결과를 낳는다. 계획은 실현할 수 없었고 무계획은 실현 가능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무계획이 또 다른 완성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통제됐을 때 우리의 이상이 ‘완성’될 수 있을까?
KakaoTalk_20190625_130411733_01.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다가오는 미래, Arrival City


앞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도시는 4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정상 가족'이 주가 되는 사회가 아니다. 1인 가구, 새로운 결합 공동체는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에는 끊임없이 이주민들이 유입되고 있다. 혼종, 혼합하는 구성원들로 인해 제3의 도시가 될 것이며 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도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앞서 언급하진 못했지만 강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개념 중 하나는 바로 ‘프레카리아트’였다. 이것은 Precarious와 Proletariat을 결합한 말로 사회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만 이익은 받지 못하는 최하층 일용직 노동자를 말한다. (이들은 기존 질서 내에서 불안하고 소외되고 분노하는 사람들로 인식된다.)


이주민들은 곧 프레카리아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주민들이 도착하여 이룩해내는 도시, 즉 'Arrival City'는 마침내 이런 프레카리아트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의 도시가 될 것이다. 새로운 아파트는 바로 이런 프레카리아트의 거주 공동체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성 집단은 새로운 구성원들이 조직하는 공간을 '슬럼'이라는 말로 배척해 왔다. 도시의 변두리에서 그들은 숨어 지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은 기존 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자들이다. 음성적으로 재개발하고 쫓아내기보단 도시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양성화해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아파트의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토레 다비드가 공존하는 사회


강의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여주며 끝을 맺었다. 이 영화는 디즈니랜드를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명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생겨난 모텔촌이 도시 빈민들의 거주지로 변화(슬럼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곳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벌이로 살아가지만 주인공 무니와 그 엄마는 그럭저럭 해맑게 살아간다.


물론 영화 속 공간이 집단 공동체의 밝은 미래를 그려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이 이러할 지라도, 우리는 앞으로 미래를 암울하게만 그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있는 반면에, 엄연히 또 다른 곳에서는 유토피아와 같은 '토레 다비드'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강재호 교수는 단지 기술, 계획, 발전 등의 개발 논리가 판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사람은 계획적으로 만들어낸 공간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 또는 공동선이 당위가 될 순 없겠지만 어떤 공동체인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공동체이냐는 '결핍한 사람들로서의 연대'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KakaoTalk_20190625_130411733_15.jpg (출처: 두산 아트센터)




나는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할 것은 공존과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전제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라는 말에 무척 공감했다. 비록 왜 그러한 가치를 전제로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왔지만ㅡ 그리고 나는 좀 뜨악했지만 ㅡ 공동체를 꿈꾸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그토록 끊임없이 공동체를 꿈꾸어 왔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이고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서 공동체 내에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 바람직한 공동체를 이루어냄으로써 우리의 자아를 이상적으로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도시인은 영혼의 노숙자'라는 말도 우리가 새로운 공동체를 꿈꿀 때, 다시 정의될 수 있음을 기대해 본다. 밤하늘의 별들처럼 하늘에서 각기 빛나고 있는 개인들은 서로 은하수를 이루어내고 별자리를 만들어내면서 어여쁜 밤하늘을 수놓는다.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별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을 배척하거나 주변으로 밀어내지 않고 함께 포용하고 서로 북돋워주면서 공존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공동체가 살아가는 아파트가 될 때,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유토피아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아파트의 미래에는 사회적 목표가 필요하다


이번 강연은 꽤나 철학적이고 어려운 개념들로 정리하는 데에 무척 시간이 걸렸지만, 마음속에 품고 지녀야 할 이상은 분명한 듯하다. 아파트의 미래는 단순히 한 건축물의 이미지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사회적 목표로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이 강연이 끝난 뒤 손뼉 치는 나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희망이 돋아나는 게 느껴지는 듯했다.


KakaoTalk_20190625_130411733_02.jpg (출처: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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