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너흰 내게 지금의 얼굴보다는 어린 시절 모습으로 기억 속에 그대로 박혀 있는 것 같아.
우리 언제 이렇게 나이 들어버린 걸까.
그러고 보니, 아니, 지금 알았는데! 면발을 필두로 해서 모두 결혼하고 얼마 전 쭈꾸미까지. 나만 빼놓고 모두 결혼했구나.
애가 있는 친구들도 여러 명이고. 가끔 육아 얘기도 오가고 말이야.
새삼 또다시, 너희들과 나 사이 동떨어진 느낌을 느끼는 것 같아.
너희들은 몰랐겠지만.
아니, 알 것 같지만.
얼마 전, 에이프릴 현주라는 전 멤버의 남동생이 올린 글 때문에 아이돌그룹 내 왕따 사건이 큰 화제가 된 적 있었어. 혹시 아니?
무심코 보던 그 사건,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어느 동영상에서 진솔이란 멤버가 현주와 함께 찍은 영상이 있더라.
그런데 있지, 그걸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어.
내가 기억하는 어느 눈빛과 너무 닮았거든.
정확히 말하면, 중학교 2학년 때 어떤 애가 나를 바라보던 그 멸시에 가득 찬 눈빛이, 진솔이 현주를 바라보는 눈빛과 정말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지. 한동안 그 애를 잊고 있었지만, 무섭도록 그 눈빛만은 기억나는 걸 보면, 결코 잊어버렸던 게 아니었던 거야.
너흰 알겠니? 그 애를?
바로 '콩'이야.
하도 오래전 일이라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서 잠깐 머리를 써야 했는데... 맞아. 이름은 '권희정'이었지.
정말 기억이라곤 눈꼽만큼도 하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 짜증이 날 정도로) 그 눈빛, 그 아이가 툭툭 내뱉으며 움직이던 꼬물거리던 입 모양이 똑똑히 기억이 나.
에이프릴 진솔 동영상을 몇 번이고 다시 보면서 점점 더 기억은 새빨개졌어.
몇 주 내내 불쾌하고 머리통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고, 길을 걷다가, 컴퓨터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세수를 하다가, 잠을 뒤척이다가, 문득문득 콱ㅡ 심장이 콱ㅡ 억눌러지는 듯한 답답한 느낌이 들더라.
그 애는 내 기억 속에서 나를 아직도 괴롭히고 있어.
그 기억은 무려 현실 속에서 존재했던 것이지. 그 애는 중2 때 나를 무참히 괴롭혔던 거야.
소위 말해서 날 '은따'시킨 장본인이지.
은근히, 돌려서 공격하는 말하기의 달인이었는데 그 애는, 그 공격의 화살은 언제나 나였어.
하지만 언제나 뭔가 애매한 말들, 직접적이지 않고 돌려 까는 말들로 나는, 그 애의 말에 하나도 반박조차 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나. 억울하게시리.
너희도 알겠지만 나 정말이지 옛날 일을 기억하는 데에 젬병이지.
안타깝게도 그래서 그 애가 나에게 했던 말, 했던 짓을 잘 기억하지 못해.
하지만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건, 그 애와 같은 반을 하고 언제부턴가 매일매일 학교가 가기 싫어졌다는 거야.
그리고 심지어 학교를 마치고 학원가는 길에 학원 건물 계단에 앉아,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엄청 울었던 게 기억이 나. 그런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고.
내 기억으론 인생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어.
하나, 기억이 난다. 그 애가 했던 말들 중에서.
수업시간에 (체육이었던 것 같은데 운동장에 나가지 않고) 교실에서 자습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자습을 하지 않고 교실 뒤 땅바닥에 앉아 게시판 마분지를 꾸미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 애가 저기 앞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 "왜 쟤네만 저러는데? 다 자습하는데 뭔데 지들끼리 저러고 앉아있는지 모르겠네.(왜 저렇게 특별 취급을 받는데?) 어쩌구 저쩌구......"
그때의 상황은, 전교 행사 준비 때문에 아마 게시판 홍보물을 그날까지 꾸며야 했던 걸로 아는데, 그런데 너무 시간이 없었고 그래서 선생님께서 나랑 어떤 친구랑 둘은 자습시간에 꾸미기를 마저 하라고 하셔서 그걸 다 끝내기 위해 뒤에 앉아있었던 걸로 기억해.
다 들리게, 나에게 대놓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나를 공격하는 말을 했지. 그 애는, 딱 그 말만 들으면 별 거 아닌 말들을 하며 참 희한하게도 요리조리 피해가며 직접 공격하는 말들은 하지 않았어. 내가 복장이 터지는 것도 이 부분이야. 내가 화를 내기엔 애매한 말들. 하지만 보란 듯이 아주 교묘하게 가시돋친 말들을 하며 주변 친구들의 동조를 이끌어내며 분위기를 흑화시키는 데에 상당한 재주가 있었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무심코 던지는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아 죽듯 ㅡ 내겐 그 사소한 말들이 주변 친구들의 외면과 함께그래서 너무나 아프게 들리는 것이었어.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안 들리는 척했고, 교실의 누구든지 그 말을 들었음에도 아무도 못 들은 척했지.
그때의 공기는 지옥 같았어. 난 귀가 빨개졌고 심장이 너무너무 빨리 뛰었어. 뭐라고 반박해야 했지만, 그래서 입 밖으로 무슨 말이든 나오려고 입술이 달싹거렸는데, 그 순간이 롤러코스터처럼 너무 빨리 지나갔어. 그렇지만 차마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지. 구시렁구시렁 혼자 다 들으라는 듯 볼멘소리를 하는 그 악마 같은 독설을 반박할 만큼 난 독하지 못했던 거야.
매일같이 무너졌지만 유독 그날은 기억이 나. 왜냐하면 교실이 너무 조용했고 그 아이의 말소리는 정적의 공기를 확성기 삼아 유독 크게 들렸고 다른 아이들이 숨죽이는 소리까지,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약해 빠져 영혼이 무너지는 소리까지, 모두에게 들리는 것 같았거든.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두들 선생님이 시켜서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걸 아는데, 그 아이는 내가 무슨 특권을 누린다는 듯이, (아마 내가 학급 간부여서 선생님이 뭔가를 시킨 것만으로도 아니꼬워했던 것 같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날도 그렇게 배알 꼴린 심보를 배설했던 거야. 은근히 내 욕을 하면서 다른 애들을 선동하면서.
얘들아.
나 힘들었어, 그때.
그런데 이 말을 지금에서야 한다.
왜 힘들단 얘기를 너희에게 하는 걸까.
나는 왜 그날 일을, 콩이 지껄였던 말을 너희에게 털어놓고 싶은 걸까.
왜 혼자서 이렇게 너희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타박타박 털어놓고 있는 걸까.
수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도저히 아직까지도 그 애에게 반박할 용기가 나지 않는 이유를 구걸하며, 너희에게, 너희는 좀 알아줬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사정하는 걸까.
그날 모두가 그 애의 말을 듣던 조용한 자습시간에,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말해주지 않았지.
어느 누구도. 내가 기대했던 건 바로 너희들이었어.
나의 친구들, 쭈꾸미, 차다, 붕어, 면발, 할매, 지그니, 마박......
너희들은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너흰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 그건 다른 말로 '방관'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나의 친구들은 방관자였어.'
그 사실이, 콩이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사실보다 더 가슴이 아파.
어쩌면 너희도 나를 은따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너무 가슴 아플 것 같다. 아니라고 믿고 싶어.
아직도 나는 인정하기 싫지만... 너흰 나를 두고 은근히 따돌리던 주동자의 옆에서 그저 지켜만 보던 사람들이었고 나의 상황을 애써 모른 척했더란 거야.
나의.. 친구들아.
너희에게 물어보고 싶어.
혹시 너희도 콩처럼 나를 미워했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잘못한 일이 있었니?
콩이 욕하던 걸 들으면서도 아무 말하지 않았던 건 그 애의 말에 동조한 거였을까?
왜 그 애가 나를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어.
다만 너무 기가 찬 건, 그 애가 은근히 우리랑 같이 놀고 싶어 하는 걸 알았을 때, 내가 그 애에게 "무슨~ 같이 놀자!!"라며 잡아끌고 같이 얘기하고 같이 지내도록 맨 처음엔 그랬단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갈수록 그 애는 '우리'가 아니라, '자기편'을 만들고 있었지.
학기 초에 너희들과 함께 한 즐거운 기억이 더 선명한 나는 어느 순간 그 애가 나를 따돌리고 너희들과 함께 놀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어.
내 주변엔 가끔 마박만 나랑 놀아주는 느낌이었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빼낸 것 같은 심정인데, 이상하게 그 애는 계속 나를 험담했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항상 나를 은근히 디스 했어.
항상 나를 혼자 두게 만들었어.
왜 그 애는 그랬던 건지, 왜 너희랑 멀어지게 된 건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겠어.
뭔가... 단서가 있다면 그때 그 사건이었던 걸까?
학급 마지막 즈음, 모든 반 애들이 들고일어났지.
안경 낀 그 친구, (최씨였다는 성만 기억나고 이름이 기억 안 나는) 그 친구는 그때 벌떡 일어서서 "선생님은 **(나)를 편애하시잖아요!"라고 주장했어. 정의를 구현한다는 미명 하에- 아이들은 헐크처럼 변해 맹렬하게 따져들었지. 내 기억엔 그날, 우리 반 아이들은 정말 무서웠어.
반 아이들이 선생님과 나 사이를, 그리고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오해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더라. 정말로 선생님이 나만 편애하셨더라면 난 그렇게 황당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을 거야.
아니ㅡ 내가 알기론 우리 담임선생님은 문학을 정말 사랑하는 풋풋한 새내기 국어 선생님이셨고 글쓰기에 반짝이는 소질을 보이던 '붕어'를 오히려 애틋하게 아끼셨어. (그애를 따로 불러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라고 격려하시는 걸 보았고 내가 붕어를 부러워했던 게 기억 나.)
부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그토록 열정적이셨던 선생님이 충격을 받고 어깨를 덜덜 떨면서 절망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하시려 교탁에 오래도록 고개를 떨구고 계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끝내 선생님은 울음을 터뜨리고 마셨지.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 내가 철없이 굴었나? 내가 유별나게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듯 굴었나? 내가 뭘 잘못해서 선생님까지 이렇게 곤경에 빠뜨렸을까. 어떻게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생각해내느라 정신이 없었지.
지금은 내가 중2 때 반장이었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그렇게 내가 선생님의 심부름을 자주 하고 뭔가 위세를 떨었나? 내가 알량한 공부 좀 잘 한다고 그땐 우리집이 좀 잘 살았다고 너희에게 고깝게 굴었나? 아니 ㅡ 어느 친구집에 놀러가서 상상 이상으로 좁고 낡은 집에서 사는 걸 보고 난 그래서 화장실이 2개가 있는 아파트에 산다고 차마 말을 못했고 넓은 우리집이 오히려 부끄러워서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았어. 난 그게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어떻게 내가 반 아이들에게, 너희들에게 밉보였는지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간절하게 묻고 싶은 건,
'너희도 내가 싫었던 걸까?'
'객관적으로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말 좀 해 줄래?'
내 기억이 단편적이고 오로지 내 입장에서만 선택적 기억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해. 오히려 내가 뭘 잘못 알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그때의 상황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콩은 나를 욕했는지, 왜 너희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나아가서.. 이건 좀 다른 부분에서... 왜 아이들은 선생님이 나만 예뻐한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얘들아,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얼마 전 쭈꾸미 결혼을 앞두고 내가 다리가 아파서 못 간다고 한 건, 반은 진심 반은 거짓말이었어.
정말 무릎 통증이 심해 매일 병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그래도 서울까지 결혼식에 달려갔을 거야.
하지만 그때 하필이면 운동선수 학교폭력 사건, 아이돌이나 배우의 왕따 사건들이 재점화되던 시점이라 결혼식 즈음해서 우리 단체 카톡방이 되살아나서 활발하게 떠들게 됐는데, 나는 중학교 때가 자꾸만 오버랩돼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
왜 하필 이때...
쭈꾸미한텐, 미안하지만 결혼식에 못 간다고 했어. 다른 친구들이 조잘조잘 결혼선물을 고르고 정하면 나는 말없이 그냥 부조만 했지.
쭈꾸미가 개인 톡으로 문자가 왔더라.
"**야/ 건강히 잘 지내면/ 다행이다/ 나는 고딩때부터/니를좋아했고/연락잘못해도/언제나/내친구이런느낌이라/언제든연락주고/보자 내친구"
나는 차마 답장을 하지 못했고, 그건... 결혼을 앞두고 있는 너에게 내 심정을 말하고픈 충동을 억누르느라 힘들었고 내 기억은 헛된 과거의 일로 남겨두자고 생각하며 아무 말하지 못하고 삼켰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또 우리 중학교 동창이야, 쭈꾸마.) 네가 나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잘 알기에, 나 또한 너를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기에, 너의 결혼식을 앞두고 내가 든 감정은 충동적인 피해의식이라고 당연하게 치부할 수 있었던 거야.
아마 이 얘기를 털어놓는다 치면 그래도 제일 먼저 쭈꾸미에게 말하지 않을까 싶어.
하필이면, 너의 결혼 즈음에, 비록 연락은 자주 하지 못할지언정 축하는 진심을 다해 온 마음으로 결혼을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쭈꾸마.
얘들아,
한때 우리는 '애자파'라는 이름으로 철없는 중2 시절을 함께 했어.(물론 그 이름은 철없는 중2병 걸린 애들이 쓰던 말이고 더없이 문제적인 말이라 시간이 지난 후 많이 반성하고 더 이상 우리를 그렇게 부르지 않게 되었지. 그런 말은 절대 쓰지 말자 앞으로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부끄럽다. 혹여나 이걸 읽고 불쾌감을 느낄 분들에게 정말정말 죄송하다.)
('~파'라고 해서) 처음부터 무슨 멤버를 구성한 게 아니고, 처음엔 쭈꾸미랑 면발이랑 친했던 것 같고 차다, 붕어가 죽이 잘 맞았던 것 같고 마박이랑 내가 유독 붙어다녔던 것 같고 할매는 항상 혼자인 척했지만 차다가 할매를 맨날 데리고 온 것 같도 제일 멀리사는 지그니까지ㅡ 그렇게 알음알음 서로서로 친해졌던 것 같아. 나중에 우리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다 웃기는 애들이라 별명을 붙이고 종종 같이 놀러가면서 추후에 '우리'가 되었던 것 같고.
난 중1 끝무렵에 전학을 와서 중2 올라가고 새로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이 너희들이었지. 학기 초 하루하루 대화를 쌓아나가고 함께 하는 시간들이 별 거 아닌데도 너무 기뻤던 그때 감정이 기억이 나. 그래서인지 내가 아는 몇 없는 친구들인 너희에게 의지도 많이 했던 것 같아.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으로 친해지게 됐는지,하지만 어떻게 콩이랑 엮이면서 나만 멀어지게 됐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을 유지하게 됐는지, 솔직히 난 다 어렴풋하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도 콩은 너희와 한두 번 보았던 것 같아. (나는 그래서 안 나가고.) 그치만 결국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건 우리들이네.
난 우리가 같이 만화책방에 가서 서로 돌려가며 만화책을 빌리고 수업시간에 책 뒤에 몰래 만화책을 넘겨보면서 온갖 만화책을 섭렵했던 걸 기억해.
나는 처음으로 친구들이랑 같이 노래방에도 가봤고 안 부른다는 거 용기를 내 참 지지리도 못 부르는 내가 노래를 부르고, 그때 일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칭찬(?)이었던 말을 쭈꾸미가 해 주었지. "**야, 니는 노래를 참 정직하게 부른다~!".
그때 유행하던 스티커 사진도 같이 찍었고 창동 롯데리아에서 항상 모였던 게 기억이 나.
물론 난 같이 놀러 나가는 거 잘 못해서 학교 마치고 같이 집에 가던 하교 길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육교 건너고 떡볶이 노나 먹고 하천길 따라가다 아폴로 같은 불량식품 먹고 쓰레기 버리려고 하면 내가 쓰레기 버리지 말라고 잔소리하고 그때 유행하던 말인 "즐~" 이 말좀 쓰지 말라고 잔소리하고. (그러고 보면 나 유별나게 군 건가. 그래도 착한 너희들은 내 범생이같은 모습에 귀찮아하면서도 진심으로 좋아해줬던 것 같아.) 우리 참새 방앗간이었던 만화책방 가고 여기서 한 명 저기서 한 명 명 헤어지고 하천길 끝나면 마지막으로 저 밑에 두배로마트 앞에 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나도 헤어지고.
너희랑 웃고 떠든 기억이 훨씬 더 많아. 너흰 유쾌하기 짝이 없었고 착하고 개성있고 똑똑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좋은 친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부인할 수가 없는 건,
나는 좋은 기억을 함께 한 너희들과 졸업 후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진 연락과 단톡방, 그리고 여러 만남들에서도 나는 유독 빠지고 연락을 못 하고 안 만나고 그렇게 겉돌아왔다는 거야.
이에 대해서 별생각 없었던 나였지만 지금은,
새삼 옛날 기억을 수면 아래서 완전히 수면 바깥으로 꺼내 본 지금은,
그게 바로 너희들에 대한 잠재된 피해의식, 외로움, 미움, 슬픔 때문인 걸 알겠어.
그리고 이건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못한ㅡ 다 아는 비밀이야.
어쩌면~ 간절한 소망일지도 모르겠는데, 너희가 내 마음을 몰랐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너희가 화들짝 놀라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정말 몰랐으면 좋겠다.
나의 지금 심정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유지해 온 우정이란 이름의 평화가 깨지는 게 두려울 정도다.
진실을 말하는 게 이토록 어렵구나.
내가 '은따를 당한 피해자'라는 걸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ㅡ
콩은 바로 은따의 주동자이자 '가해자'였다는 것 ㅡ
그리고 너희들도 은따를 당하던 나를 도와주지 않은 '방관자'였다는 것 ㅡ
이 세 가지 사실을 깨닫는 것조차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리고 아직 콩에게도 너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그토록 약자에 대한 폭력에 민감하던 내가 정작 나의 피해에 대해 이토록 둔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
정말이지 내가 이럴 줄 몰랐어.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거야. 내가 '따'를 당했던 게 너무 창피했던 거야.
난 폭력을 고발하고 도움을 구할 용기가 없었던 거야. 오히려 내가 뭘 잘못해서 이지경이 됐는지 허겁지겁 생각하기 급급했던 거야.
지금도.
배우 서신애 씨의 입장문이 너무 사무치게 와 닿았어.
그 배우는 글도 참 잘 쓰더라. 조곤조곤 조용한 분노를 용기 있게 잘 말하고 있었어.
그이 덕분에 한동안 답답함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나도 겨우 글을 쓸 용기가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같은 아픔을 나눈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해 주었기 때문에 ㅡ 기억도 희미하고 사리분별을 하지 못했던 내가 비로소 명암이 뚜렷이 보이게 된 것 같아.
내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만으로도~ 내가 앞으로 행해야 할 말과 행동에서 정의를 찾을 수 있게 되었거든.
얘들아, 말할 용기가 아직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말하고 싶어.
"너희들도 내게 남긴 상처가 크다"라고 말이야.
함께 한 추억도 많고 비록 좋은 아이들이지만, 나는 이따금 너희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 솔직히 그때 일들을 자꾸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내가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더 이상 과거를 긁어 회상하지 않을 수 있게, 너희들이 지금이라도 나를 좀 도와줬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