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였다.
그의 연애 스타일을 알고 싶어 대수롭지 않게 물어본 질문이 화근이었다.
- 연애를 많이 해보셨나요?
- 남들 보단 적게 한 것 같아요. 몇 번 정도.
- 가장 오래 한 연애가 얼마나 되셨어요?
- 음.. 한 7년이요?
- 네? ......
그의 답변을 듣자마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7년을 연애할 수가 있지?
나는 제일 길었던 연애가 1년 조금 넘게, 그것도 헤어졌다 다시 만나서 약 400일을 보낸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자그마치 7년이란 세월을 어느 누군가와 함께 했다.
7년이라...
그 이후로 7년은 나를 줄기차게 따라다녔던 것 같다.
우리가 교제하기로 약속했던 날, 한껏 들뜬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7년보다는 더 사귈 수 있을까?'
우리의 100일을 맞이했을 때도 나는 또 그녀를 생각했다.
'겨우 백일이네. 7년이 되려면...'
우리가 1주년을 맞이한다 해도, 나는 또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6년 남았음.'
그 7년이란 세월보다 더 살아야만 우리가 진정한 커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7년 보다 더 그와 사귀는 거라고,
심지어 그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소 고집스러운 점이 없잖아 있지만, 나는 도통 7년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까지 짬짬이 수집한 정보로는,
'그녀'는 그가 좋아해서 대시한 학교 후배였고
키가 작고 아담한 스타일이었다고 하는데,
'그녀'는 그와 CC로 대학 생활을 함께 하였으며,
그렇게 서른 살까지 그들의 이십 대를 오롯이 함께 보낸 커플이었다.
나는 그토록 오래 사귀었음에도 결혼까지 가지 못한 이유를 물었는데,
그의 말로는 자주 싸웠던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나는 가끔 그에게 옛날 연애 얘기를 물어보았다.
사실 물어보려는 상대는 바로 '그녀'였는데 그는 다른 이와의 연애 경험을 이야기해 줬다.
그는 가끔씩 묻지도 않았는데 연애 시절 얘기를 직접 꺼내기도 했지만, 몇 번의 연애 경험 중 한 번도 '그녀'와 관련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녀'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 같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괜히 그런 느낌인 걸까?
정작 내가 궁금한 건 안 좋게 헤어진 다른 여자친구들이 아닌 바로 '그녀'였다.
나는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 근데 그분은요?
- 누구요?
- 가장 길게 연애한 여자친구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 음..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 왜요??
- 좋았던 기억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 ......
그는 나를 입다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 그냥 솔직했을 뿐인데 그의 답변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와 오랫동안 연인 관계를 나누었으니 좋았던 기억이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지만, 그 말을 들었던 나는 절대 다가갈 수 없는 유리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말할 수 없는 좋았던 기억이라니.
입 밖에 꺼내면 그 좋았던 감정이 휘발돼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을까?
마음 한편은 오롯이 그녀와 함께 한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것일 테다.
나는 겨우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선 신참 연인인지라, 그의 역사를 소급해서 알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알 권리가 있다 해도, 설사 내가 물어보아서 그가 답해준다고 해도 슬픈 건 마찬가지다.
변함없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남은 미래는 함께할 수 있을지언정, 앞으로도 평생 그의 과거를 함께할 수는 없다.
그와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는 단순하지만 엄연한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또 생각난 이유는 바로 이 썸네일 때문이다.
우연히 커뮤니티 게시판 글을 보다가
"그냥 보자마자 전의상실하게 되는 썸네일. jpg"라는 제목이 있었다.
이렇게 여신같은 전 여친 구 여친이라면야, 맞는 말.
내 이름은 김삼순
이 드라마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유희진(정려원)을 모를 리 없다.
그녀는 옛 남자친구 진헌(현빈)을 말도 없이 떠났지만 사실은 암에 걸렸기 때문에 오래 사귄 연인에게 부담이 될까 봐 떠난 것이었다.
다시 돌아온 희진은 진헌이 (삼순이에 대한 감정을 숨길 수 없어) 이별을 통보할 때, 오래도록 함께했던 세월에 배신감을 느끼고 울면서 그를 때린다.
희진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반짝반짝하겠지만 시간이 가면 다 똑같아!"
진헌은 말했다.
"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라고.
나는 집요한 걸까?
얼마 전엔 또 '그녀'의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다.
- 이름이 뭐였어요?
- 음.. 이름이 정말 예뻤어요. (땡)(땡)(땡)
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정말 예쁜 이름이었다.
나도 아빠가 지어주신 한글 이름으로 어디 가나 이름 예쁘다 소리 좀 듣는데,
근데 그는 나보고 이름이 예쁘다고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두고 "정말 예뻤다"고 말했다.
얼굴이 예뻤다는 사실보다도, 훨씬 더 샘이 나는 것 같았다.
이젠 물어보지 말아야지.
이렇게 다짐하면서도 매번 궁금해서 물어보게 된다.
하지만 이젠 정말 물어보지 말아야지.
우리가 함께하는 순간들이 꽉 차 있는데, 나는 자꾸만 내가 갖지 못한 그의 순간을 가진 그녀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그와 과거를 함께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그와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나는 앞으로 7년을 더 사귀어야 그녀를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단 하루만 그와 함께할지라도, 이 또한 그녀가 갖지 못한 기억일 것이다.
나는 애써 그녀를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꼭 이겨야겠느냐마는...
아직은 1년도 안 된 연애 초반이라, 그런 조바심이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너무 좋기만 하고 다 좋은데,
왜 사람들은 좀 그렇지 않나? 너무 좋은 순간이면 오히려 불안한 거?
좀 더 안정적인 연애기로 접어들면 덜할까.
이 불안함을 해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좀 덜 좋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해질수록 불안감은 해소될 테고,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과거는 그저 과거에 존재하고 있게 될 테니까.
결국 나의 라이벌 '그녀'는 평생 없어지지 않겠지만
하루가 쌓이고 두텁게 쌓일수록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된다.
수리수리~ 마아수리~
나의 평생 라이벌은,
평생 기억이 되리라.
단, 보이지 않는 기억이 되리라.
얍!
그는 바다다.
그는 마침내 내게로 와 해변을 적시고 대지에 닿은 바닷물은 서로 따뜻하게 온기를 나눈다.
우린 멀고도 험한 옛 파도의 기억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함께하는 순간은 드넓은 백사장 모래같이 반짝반짝이고 있다.
하염없이 넓은 시간이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