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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14. 2020

마산

<마지막 이야기>


마지막이란 것을 예감할 때가 있다. 그의 집에서 영화를 보던 날이 그랬다.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봐 달라고 아이처럼 보챘고 중간에 곤히 잠든 그를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일어난 그는 잠들지 못한 여자를 보고 팔베개를 해줬다. 그리고 마치 백일 된 아이를 재우듯 토닥토닥 다독여줬다. 그의 깊은 가슴팍에서 나는 약간 쿰쿰한 살 냄새를 맡으며 여자는 눈을 감았다. 


'우리가 보내는 밤은... 이게 마지막일 거야.'


그날 밤처럼 오늘도 여자는 그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길은 마산의 오래된 철길, 이제는 폐철길이 되어 버린 길이었다. 일 년 전 즈음엔가 철로는 콘크리트로 메워지고 산책길로 조성되었다. 양옆에는 아직은 빈약한 가로수들이 예쁘게 들어서 있었고 봄이 되면 그래도 꽃이 피고 제 나름 화사함을 뽐낼 작정인 듯 보였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큰 길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이제는 창원으로 떠나야만 했다. 여자는 그를 지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두 시까지 가려면 많이 빠듯한 것 같은데, 좀 빨리 걸을까요."

"아, 괜찮아요. 택시 타면 돼요."


그렇지, 택시를 타고 가면 되는 거였지. 간단한 시간 및 동선 정리에 여자는 그와 다름을 느꼈다. 여자와 달리 그는 아주 간단히 택시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매우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점심도 못 먹고 가서 아쉽네요."

"아니에요. 어서 가셔야죠."

"점심은 뭐 먹을 거예요?"

"음... 떡볶이나 먹을까 봐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점심 안 먹어도 돼요."


여자는 아까 그에게 쏟아낸 말들을 계속 반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련되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의 말이 탐탁지 못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더 이상 그를 좋아하는 걸 포기한다는 말이 탐탁지 않았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래도 우리 많이 발전했요."

"그렇죠."

"많은 걸 하고."

"맞아요... 정말 알지도 못한 사이에서 이렇게 아는 사이가 되고. 밥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소개팅... 뭐 데이트 같은 것도 하고."


여자는 걸음이 빨라졌다.


"그래서 사실 저는 만족해요. 이렇게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그래."


그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자가 알 수 없게 측은해졌다. 여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여자가 또 한편으 귀여워 보였다.


"갔다 오면 언제라고 그랬죠?"

"일 년 뒤요."

"갔다 오면, "

"......"

"우리 만나봅시다."

"......"


그는 여자가 뒤를 돌아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는 묵묵히 앞서 나갔다. 


중요한 건 그게 니라고, 여자는 중얼거렸다.




여자는 그와 재회하자마자 외국으로 떠난다고 말했다. 확정된 건 아니지만 가기로 예정된 참이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여자는 어디론가 곧 떠난다고 말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일면식도 없던 그를 만나러 갔다. 여자가 떠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예전에 그는 여자에게 질문한 적 있었다.


"떠나지 않을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적잖이 충격이었다. 여자는 그를 좋아했지만 정작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만약에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하면 떠날 수 없지 않을까요?"


그가 운명의 상대란 말을 꺼낸 것이 놀라운 느낌이었다.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여자에게 그는 아주 간단하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렇지, 떠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지. 


여자가 마산에 내려온 이유는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의 말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에게 그걸 말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나는 떠나지 않겠다고, 그건 바로 당신이 운명의 상대이기 때문이라고는 도무지 말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혹시라도 그가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끼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남자는 언제나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지금 이 순간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결핍은 미래의 어떤 것도 담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러한 여자의 생각은 이미 백여 년 전 어느 철학가의 글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소유의 의지는 멈춰져야만 한다. 하지만 비소유의 의지가 보여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봉헌의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을 '내 진실'에 기대게 한다. 그런데 내 진실은 절대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사랑이 결핍될 때, 나는 '포위하기'를 단념하는 군대처럼 물러가거나 자신을 분산시킨다.                                             ㅡ롤랑 바트르, <사랑의 단상> 중 '절제된 도취'


여자는 끝끝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 왔네요. 여기 이 길에서 택시 타시면 될 거예요."

"집은 어디예요?"

"걱정 마시고 어서 가세요. 시간이 벌써 한 시가 넘었어요."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


여자는 극구 사양했지만 그는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지체하는 건 어쩐지 그의 어머니께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어머니 칠순인데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근사한 밥 한 끼 사 드리는 것 밖 엔요."


여자 정말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반찬 보내주신다더니 드디어 효도하시네요."

"어이구 불효자죠."

"지금까지 어떤 반찬 보내주셨어요?"

"장아찌... 김치... 총각김치, 열무김치..."

"열무김치!"


여자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 혼잣말을 했다.


"열무김치 쫑쫑쫑 썰어서 그 국물이랑 같이 비빔밥 해 먹으면 맛있겠다."

"와~!"


그는 여자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정말......"


그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여자에게 받은 종이가방은 그의 가방에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여자에게 받기만 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운 마음도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열무김치를 두고 여자의 구수한 취향이 그가 상상하는 바와 꼭 같다는 건 정말이지 안타까 정도였다. 그래서였다.


"떡볶이 먹을래요?"

"......"

"먹고 가요. 사주고 싶네요."


여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마음을 모른 척하는 게 나았다. 그렇지 않으면, 뭐랄까,  여자는 너무 실망할지도 몰랐다. 그의 말은 사랑을 애걸하는 불쌍한 거지에게 베푸는 엽전 한 닢과 같았다. 차라리 여자를 애써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정말이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여기 벌써 다 왔어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여자는 도망치듯 그와 멀어졌다. 총총걸음에 그가 이미 사라졌을 걸 알면서도 그가 뒤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문득 가 했던 말 떠올다.


'마치 단편소설을 보는 것 같요.'


이 모든 상황이 터무니없는 소설 속 한 장면이라고ㅡ 그리고 그 장면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한마디 인사와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와의 만남은. 


여자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섰다. 어둠  침대 위 천근만근 같은 몸뚱이를 털썩 내려놓았다. 눈을 껌벅껌벅이며 어떤 순간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여자는 곧이어 뒤늦은 슬픔 저 아래에서부터 북받치는 걸 느꼈다.


한참 동안 울었을 것이다. 그렇게 울다가, 여자는 지쳐 잠들었다. 


'지금쯤이면... 마산을 벗어났겠지.' 


여자는 꿈속에서 되뇌었다. 그가 마산에 온 지 17시간 만이었다.
























에필로그


철길의 끝은 또 다른 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곳은 재개발 중인 북마산 시장길이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회산교라는 다리예요."

"어, 여기가 회산교예요?"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덕분에 여자 또한 놀랐다. 그는 예전에 어머니께서 이 근처에서 장사를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아주 어릴 적 기억의 조각 우연히 맞닥뜨린 이곳에서 조금씩 맞춰지고 있었다.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 곁을 떠나 주변에서 뛰놀던 하천이 바로 여기였는데, 이젠 어마어마한 세월이 흘러 그의 어머니는 칠순을 맞이하셨다.

  

한때는 마산에서 매우 잘 나가던 북마산 시장이었다. 하지만 시내 중심지가 옮겨가며 이곳 시장은 점차 발길이 줄었고 곧 들어설 거대 아파트 단지 때문에 이제 쇠락함을 넘어서 아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철거를 반대한다는 적개심 가득한 날것 그대로의 말들이 곳곳에 플래카드로 내걸려 있었다. 곳곳의 주택들이 이미 철거되었고 뼈만 남은 집들이 도처에 있었다.


"이렇게 또 없어지네요."

"그러게요. 남겨놓을 생각을 안 하고 언제나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기 바쁘죠."

"한번 가볼까요?"


그와 여자는 황폐한 골목길을 조심스레 헤치고 들어갔다. 어느 부서진 대문 너머로 곳곳의 문들이 뻥 뚫린 집을 발견했다. 이런 곳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어쩐지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는 그것이 누군가 살던 집이라기보단 어떤 '흔적'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곧 사라질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미 사라져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응시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 흔적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을 바라본 순간, 그것은 그와 함께한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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