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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an 22. 2020

마산

<다섯 번째 이야기>


여자가 문신 미술관에 가자고 말하자 그는 좀 놀라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몸에 새기는 문신을 보러 가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문신은 마산이 낳은 뛰어난 작가. 그는 오랜 외국 생활 후 어린 시절을 보낸 마산에 돌아와 직접 미술관을 지었다고 한다. 마산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높고 푸른 추산동 어귀에서다.


여자는 그곳을 좋아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이와 함께 하길 좋아했다.


오동동 구시가지에서 창동을 지나 철길 산책로에 다다라 가고파 꼬부랑길을 거쳐 마침내 추산동 문신미술관까지. 여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고의 산책코스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가 전날 밤 잠을 설쳤을 때, 여자는 그를 데리고 어디를 가야 할지 생각하느라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간판들이 참 어디 가서 보기 힘든 풍경이네요."

"아."

"제가 항상 활자를 읽고 다니는 습관이 있어요."

"네."


여자는 마음속으로 재촉했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어서 그에게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그는 태평한 모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낡고 버린 듯 손대지 않은 마산의 풍경을 보며 그는 새삼 애정을 느꼈다. 그에게 마산은 멈춰버린 기억 속 공간이었다. 지금 이 산책길이 낡은 사진 속을 걷는 것이기도 했다. 낯선 이방인의 신분으로 이곳을 걷는다는 게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가 조금만 더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느낌, 이야기를 말해주고 싶었다. 그는 속도를 내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는 조금 천천히 걷자고 여자에게 사인을 보냈지만 여자는 읽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걸음이 빨랐고 그는 걸음이 느렸다. 동행이라고 하기엔 둘은 길을 걷는 모습이 너무나 달랐다.   


"아, 뛰고 싶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철없다고 해야 할지. 여자는 그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제대로 맞장구쳐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화장실에 다녀온 남자들의 90%가 손을 안 씻는다는 뉴스 기사 얘기를 하면서 "손 안 씻으시죠?"라고 물어본다든지.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또 당황하고 말았다.


"막 달리면 기분이 좋거든요."

"……."

"달리기 하실래요?"


갑자기 내리막길을 보자마자이런 여자에게 그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여자는 엉뚱한 게 아니었다. 다만 약간 착각했을 뿐이다. 남자는 무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그것은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자는 그와 함께 달리고 싶어 했다. 그가 달리고 싶 그가 부끄러워할까 봐 였다


하지만 사실 그는 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의 진심을 오해한 것이야말로 여자가 완벽히 착각한 부분이었다.




“저기 벤치에 잠깐 앉으실래요?”


전시를 다 보고 나서, 아직 조금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여자는 그를 붙잡았다.


“사실은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우선.


여자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추운 겨울날 종이컵에 담긴 차 한 잔이란, 바깥바람에  아리도록 렸다. 그 와중에 차 한 모금은 혀를 살짝 데일 정도로 뜨거웠. 가방 안에는 작은 종이가방이,  안에는 비스킷과 차 티백 같은 뭐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들어었다.


"이것 좀 드세요. 이건 올라가실 때 드시고요."


여자는 책  권 꺼냈다. 예전에 남자가 빌려준 이었다.


"아, 이 책. 어땠어요?"

"좋았어요. 사실..."

"사랑의 역사. 작가는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제목을 붙였던 걸까 그게 참 궁금했어요."

"전 사실 책이 낡아서 좋았어요. 왜 이렇게 쭈글쭈글해졌는지 궁금하더라고요. 혹시 무슨 사연이라도..."

"그냥 왜 책 같은 거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비에 젖고 그러잖아요. 특별한 기억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많이 낡았네요."


여자는 뭔가 개운 못했다. 여자는 책 사이에 꽂힌 영수증에 꽂혀 있었다.


"영수증 하나를 발견했는데,"

"뭐죠?"

"학교 서점에서 책을 사셨나 봐요."


그는 책을 집어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책을 잘 사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사는 것 또한 쉬운 일일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떠올리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장마가 계속되던 여름날, 그는 무심코 가방을 메고 도서관을 나왔다. 가방이 젖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 채 그는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웠고 신촌에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느 학원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면서 축축한 느낌에 가방 밑이 다 젖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여자는 이런 시시한 풍경을,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그가 들려주기를 기대했던 거였다.





여자는 책을 놓고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예전에 제가 물어본 적이 있죠. 저에 대한 감정이 좋아하는 것 같으냐고요. 그때 ‘싫지 않습니다.’라고 얘기하셨어요. 기억나세요?"

"네."

"그 말을 듣고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봤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

"......."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볼 때, 저는 떡볶이라고 말할 것 같아요. 물론 어묵이랑 순대도 ' 않지만' 떡볶이는 좋아하거든요."

"......."

"그러니까 싫지 않다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

"그러니까 그쪽은 저를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제가 결론을 내리자.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요?”


사실 그때 여자는 당황했다. 그가 갑자기 이렇게 말한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고?' 심장이 돌아설 뻔했다. 하지만 또 만약에라니, 그게 아니라는 게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거지. 따지고 보면 결국 알맹이가 없는 말이었다. 여자에 생각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제 말을 믿으셔야 해요."

"……."

"왜냐하면... 본인이 생각한 시간보다 제가 그쪽 마음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더 많을 거거든요."

"……."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

"자신의 감정을 좀… 제대로 아셨으면 좋겠어요."

"……."


천천히 또박또박, 느리지만 쉴 새 없이, 천천히 조여오는 여자의 말을 듣고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불어닥치는 바람에도 두 뺨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굳이 애쓰지 마시라고……."


여자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저도 좋아하는 그만 하려구.”


그는 이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분명히 여자와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미술관 앞 벤치에서 비스킷을 뜯고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깊은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들곤, 자신이 파란 하늘을 들이켰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책을 집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이 뭐랄까. 너무 빨리 지나가서, 무슨 단편소설을 보는 것 같아요.”


는 웃는 것 같았다. 여자는 차를 마셨다. 보온병은 너무 성능이 좋아서 아직도 뜨거운 차가 그대로였다. 여자는 이 종이컵 한 잔이 놓이기까지 오늘 아침, 어젯밤, 기차역에서, 그와 처음으로 연락이란 걸 하던 과거의 어느 날까지 되돌아갔다. 모든 게 다시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침엔 눈이 올 것처럼 찌푸렸던 하늘이 어느새 맑게 개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가 오간 줄도 모르고 하늘은 너무 새파랗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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