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Jan 17. 2020

마산

<네 번째 이야기>


다음 날 그를 만나기로 한 곳은 코아양과였다. 그곳은 마산 사람들이라면 으레 약속을 잡곤 하는 만남의 장소였다. 여자는 애초에 만나기로 한 시각보다 한참 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도 역시 약속 시각보단 조금 이르게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여자는 모른 척했지만 그도 아마 모른 척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둘은 횡단보도 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둘 사이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시야를 가릴 듯 말 듯 쏜살같이 지나가는 바람에 그들은 보지도 보지 않을 수도 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여자는 남자보다 빨랐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여자가 있었다.


잠은 잘 주무셨어요?”

“거의 못 잤어요." 

"…."

"아침 뱃고동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만일 이때 그가 잠을 잘 잤다고 말했더라면.


그가 불면증이 있다는 건 여자도 알고 있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조심스레 그에게 잠을 잘 잤냐고 물었던 건, 분명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말하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불면증이 제 잘못이라도 되는 양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낯설고 값싼 모텔에서 머물게 한 것이 잘못이었다. 얼핏 그가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마산에 온 것이, 아니, 어쩌면 그가 마산에 오도록 여자가 바랐던 것이 잘못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여자는 그에게 후회스러운 밤을 보내도록 한 장본인이 된 것만 같았다.


“모텔에서 주무셔서 그런가 봐요. 어떡하죠, 피곤하시죠.... 등대를 보러 가지 말까요?”

“아, 등대 아침에 보고 왔어요."


그의 말에, 여자는 가슴에 철렁 무언가 내려앉았다. 아마도 툭 하고 떨어져 버린 건, 소시지가 쏙 빠져버린 핫도그같은 것이었을 테다. 여자는 또 그것을 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무엇이 여자를 혼란스럽게 만든 건지 혼란스러웠다.


"사실 등대를 찾아갔는데, 그런데 방파제 출입을 못 하게 돼 있더라구요.”


"그럼 좀 더 일찍 만나자고 하지 그러셨어요"라고 말하려다가, 무시로 많은 생각이 여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학창 시절 틈만 나면 혼자 등대를 찾아가 그 아래에서 음악을 들었다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언젠가 고등학생 때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다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그는 어제 여자가 등대에 가보자고 말했을 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도 같았다. 


또다시 툭 하고, 여자는 허공에 속이 텅 빈 핫도그마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애초에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


여자는 당연히 등대를 같이 보러 가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마산 창동 거리는 추웠다. 아직 아침의 찬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채 정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화로웠던 창동 거리에 이젠 사람은 없고 드문드문 양말이나 신발 같은, 좌판대가 널려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들은 거리의 주인공이 되어 창동 사거리를 지나 학문당 서점 쪽으로 다다랐다. 거기서 여자가 남자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우동집이었다. 골목 깊숙한 곳에 홀로 유리창에 김이 서려 있었다. 안은 작았고 테이블 세 개는 모두 비어 있었다. 여자는 자리에 앉자 비로소 짧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곳은 50년 전통의 우동집이었다. 굳이 전통을 강조할 만큼 장인정신이 투철하거나 마산에서 뛰어나게 유명한 집은 아니었지만 여자는 그냥 이곳을 좋아했다. 이곳이 유명하지 않은 것은 생생정보통이니 그런 곳에서 방송을 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오히려 너무 붐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이런 작고 오래된 곳을 좋아했다. 그런 곳은 또 항상 맛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입맛에 지나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만큼 그가 가는 식당은 믿음과 충성도로 똘똘 뭉친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는 그와 처음으로 밥을 먹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의 회사 앞, 낡은 골목길을 지나갈 때 여자는 무척 설레 했었다. 물론 남자를 따라가는 것이 기뻐서이기도 했지만 이 끝에 당도할 곳이 어느 작고 오래된 곳일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이 어느 일본식 카레집이란 걸 알았을 때, 여자는 살짝 실망이란 걸 했다. 그곳은 여자의 취향이 아니었을뿐더러, 그의 취향도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알고 보니 그는 후배들에게 여자의 또래가 좋아할 만한 곳을 물어본 것이라고 했다. 무난하게 '여자가 좋아할 만한 예쁜 곳'을 가는 것보다 그가 좋아하는 숨은 맛집을 공유하는 것이 여자에게는 더 큰 기쁨이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배부르다.'


보기만 해도 양이 많은 우동이었다. 각종 어묵과 야채가 고명이라기엔 인심 좋게 많았고 퉁퉁하게 잘 불은 면발이 냄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앞을 가릴 정도로 뿌연 김이 우동을 들어낼 때마다 용트림 하듯 솟아올랐다. 뜨거운 국물을 크게 한입 들이켜면 후끈 속이 데워지며 '크~'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둘은 말이 없었지만 한 명이 후루룩 하고 다른 한 명이 후 불며, 쉴 새 없이 우동을 먹었다.


함께 뜨거운 음식을 먹는다는 건. 김이 서린 따뜻한 곳에서 좁은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는 건. 단 두 그릇의 냄비로 이 시간을 가득 채운다는 건.


'너무 맛있게 먹는다.'


여자는 젓가락으로 집어 들기도 어렵게 커다란 새우 한 마리를, 괜찮다며 극구 말리는 그에게 기어이 내어 주고 말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