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상품권 선물로 주는 남자

by 별별


내 곁에는 문화상품권 열 장이 있다. 무심코 한 장을 긁어 온라인쇼핑 사이트에서 캐시로 전환하려고 하니 수수료가 5% 넘게 붙는다고 한다. 물론 한 장에 500원 밖에 되지 않는다지만 열 장을 바꾸려면 5천 원이 넘는다. 이건 아니지... 나머지 아홉 장을 긁으려던 계획은 잠깐 스탑-됐다.


이 문화상품권은 어디서 오게 됐는가, 시선은 문화상품권을 발견한 편지 봉투에 머무른다. 얼마 전 서랍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옛 연애편지. 왠지 두둑하다 했더니 그 안에는 편지뿐만 아니라 상품권도 들어 있었다. 이게 왜...? 내 시선은 다시 1년 전 기억 속 풍경을 더듬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2년 전, 2023년 1월. 우리는 막 연애를 시작한 풋내기 커플이었다. 초창기 몇 번째 데이트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날이 유독 기억나는 이유는 처음으로 해가 뜬 날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저녁이거나 비가 오거나 해서 실내에서 만날 수밖에 없어 아쉬워했는데, 그날만큼은 햇빛이 있는 야외에서 만나기로 해서 특별한 느낌이었다.


정동길 어느 브런치 카페에서 밥을 먹고 오후에는 미술관 가기. ‘언젠가 연애를 한다면~’이라는 가정을 수없이 곱씹으며 내가 희망했던 바로 그 데이트 코스였다. 광화문 쪽에 추억이 많았던 나는 점찍어 놓은 연애 로망의 장소들이 참 많았다. 지겹도록 혼자 걸었던 청계천도 누군가와 함께 산책하고 싶었고,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 집에서 2인분에 계란말이도 추가해서 먹어보고 싶고, 설사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해도 (일단 사귀어야 헤어지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덕수궁 돌담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연애란 걸 하게 됐구나, 나의 로망을 모두 실현시킬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그날 왠지 아침부터 느낌이 좀 이상했다. 일단 급격히 날이 흐려져 비가 올 것 같았고 버킷리스트였던 브런치 가게는 (설 연휴 즈음이었던 듯) 영업을 하지 않았다. 어찌나 추웠던지 급히 다른 가게로 들어갔지만 거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화하기도 녹록지 않았다. 전쟁 같은 주문을 마치고 구석탱이 자리에 앉아 겨우 얼굴을 마주했을 때, 좀 많이 속상했지만, 그래도 어쩌나 이렇게 함께 마주 볼 사람이 있다는 게 한편으론 다행스러웠다.


접시를 거의 다 비울 무렵, 그는 조심스럽게 무언가 꺼냈다. 바로 편지였다. 심지어 꽤 두툼해서, 받아 들고 만지작 거리면서 몇 장이나 되는 편지일까 기대는 부풀어만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에게 반한 이유는 그가 항상 메신저 대화를 할 때마다 호흡이 긴 메시지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조바심 냈지만 긴 글을 받을 때마다 그 마음은 사르르 가라앉곤 했다. 이젠 깜짝 선물처럼 손편지라니...! 편지를 줬다는 그 자체로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해!’라며 기쁨에 가득 차 버렸다.


기대에 들떠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편지를 읽어봐도 되겠냐며 허락을 얻어 봉투를 열어봤다. 글쎄? 봉투 안에는 얇은 편지 한 장과 그리고... ‘이건 뭐지?’하고 눈을 의심한, 그건 분명 문화상품권이었다. 편지글은 얼핏 봐선 안 될 정도로 희미하게 연필로 쓰여 있었는데 상당히 흐물흐물한 느낌의 글씨체였다. (그는 미리 악필이라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글씨는 종이 한 장의 절반을 겨우 넘긴 수준이었고 아니 솔직히 말해서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깜짝 선물로 편지를 받았건만, 복어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나의 기대는 예상치 못하게 출현한 문화상품권으로 와르르 꺼져 버렸다.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들킬까 봐 눈동자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껏 편지를 줬는데, 실망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을 그가 보았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당황스러운 감정을 내 탓 아닌 다른 무언가에게 탓하고 싶었다. 그 화살은 모두 두툼한 봉투로 잔뜩 기대를 하게 만든 문화상품권으로 향했다.


그는 왜 문화상품권을 줬을까. 이 물음은 한동안 따라다녔다. 그는 작가였고 예술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예술은 순수하다는 선입견으로 예술가로서 그에 대한 환상을 키워나갔던 터라, 순수한 느낌의 편지만이 아닌 돈으로 환산가능한 상품권을 함께 줬다는 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나중에서야 이 일을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선물을 사주고 싶은데 연애 초기라 무슨 선물을 사줘야 될지 모르겠었더라고. 그래서 그냥 문화상품권을 준 것이라고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이게 바로 문화상품권에 얽힌 이야기의 전말이다. 정동길, 첫 야외 데이트, 첫 편지의 기억과 함께 생뚱맞은 상품권 더미의 폭격(?)까지.


그때와 달리 지금 난 그 문화상품권을 돈으로 환전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도 수수료 500원이 아까워서 어떻게 하면 아낄 수 있을까 검색하면서. 옛날 문화상품권을 처음으로 받아 들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려 보면 그냥 허허 웃음이 난다. 그땐 편지글이 너무 짧아서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은 편지 봉투 속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상품권만 쏙 빼갔다는 사실에 스스로 민망해하고 있다.

나를 설레게 하고 당황스럽게 했던 그는 이제 남편이 되었다. 글의 분량으로 누군가의 애정을 측정해 보려 했던 나는 섣부른 마음을 반성하는 아내가 있고 말이다.


사랑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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