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도
#오늘 새벽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에 잠을 깹니다. 간밤에는 자는 도중에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 갈증 난 상태에서 잠에 들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잠이 덜 깬 채로 목을 축이고 나니 문득 물이 필요한 곳이 저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급히 듭니다. 어젯밤 산불이 좀 진정이 되었을까 조급한 마음으로 뉴스를 켭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뉴스를 보며 점점 제 얼굴은 일그러졌습니다. 산불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소식입니다. 경북 어느 야산에서 발화한 산불이 산을 뒤덮은 것은 물론 도로와 민가, 시내까지 덮치고 있습니다. 천년 동안 역사의 격랑을 지켜본 고찰도 불길 앞에선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고 합니다. 시뻘건 불길과 연기로 자욱한 각종 뉴스 사진들이 더없이 선정적으로 느껴집니다. 비현실적이라는 생각과 이보다 더 실감 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교차합니다.
#어제저녁
밥 먹을 때 TV 뉴스를 보는 게 습관입니다만, 어제는 특히 뉴스가 하나 같이 안 좋은 소식 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째 이어지는 경북 지역 산불 뉴스를 보며 이젠 정말 큰일이다 싶었고, 서울 도로 한복판에서 싱크홀이 생겨 죄 없는 청년이 사망한 채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황망했으며, 기약 없는 탄핵 선고 지연 소식은 답답함이 밀려왔고, 이런 와중에도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대대적 (삥 뜯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투자 소식을 들으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더랍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주장하는 교과서가 승인됐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밥맛이 뚝 떨어졌습니다.
#어제 낮
요즘은 앉고 일어서는 것조차 힘든 만삭 임신 시기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인 날이었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운동을 하러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임신 후기, 뭐든 좋으니 운동을 하라고 하신 의사 선생님 권유가 있었으니 이 외출은 뱃속 아이를 위해 최소한의 노력입니다. 하지만 마스크를 빈틈없이 눌러쓰고 모자를 써 봐도 미세먼지를 막기엔 역부족입니다. 운동을 끝내고 오는 길엔 제 나름 녹초가 되어 힘이 쭉 빠지곤 하는데, 오늘은 유독 미세먼지에 더해 심한 바람이 불어 눈을 제대로 뜨고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내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바람을 맞으며, 문득 산불이 강풍 때문에 확산하고 있다는 뉴스가 떠올랐습니다. 바람과 함께 현관문이 닫히며 안전한 집에 도착한 때에는 안도감만큼이나 무거워진 마음도 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젯밤
습관처럼 포털 메인 화면을 켜는데 산불 소식으로 바로가기와 함께 ‘긴급모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몇 푼 안 되지만 뭐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기부하기 버튼을 눌러봅니다. 몇 번의 터치로 결제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손쉽게 마음의 짐을 덜어보고자 하는 제 심보에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하 수상한 요즘, 산불이 어쩌면 상징적인 느낌이 든다고요. 매일같이 위기라는 나라 사정과 미세먼지가 자욱하고 구제역이 창궐하는 요즘, 더할 나위 없이 무기력하고 두려운 느낌이 기저에 깔려있었지만 그것이 비로소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아 보인다고요. 어떤 것도 실감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것이 바로 현실’이라며 시뻘건 재난으로 현화한 모습인 것 같다고요.
몇 달 전부터 자기 전에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처음엔 교인인 동생의 부탁으로 기도를 시작했는데 매일 가족 카톡방에 기도문을 올리는 게 좋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동생은 제가 신을 믿지 않는 데에도 기도를 하면 이상하게 기도발이 잘 먹히는 것 같다고 평해 주었습니다. 그간 주변 사람들의 건강을 빌어왔지만, 어제는 산불 이야기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부족한 마음이지만 간절하게 마음을 모았습니다.
생명을 잉태한 상태에서 다른 생명이 스러져가는 것을 보는 게 힘이 듭니다. 3월 하순, 곳곳에 새순이 돋아나도 모자랄 판에 화마로 온통 잿더미가 되어갈 수만은 없습니다. 어서 빨리 불길이 잡히기를, 많은 걸 바라자면 부디 비가 내릴 수 있기를, 인간의 반성을 담보로 하는 신의 벌이라면 우리는 기필코 반성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제게 주어진 하루로 시작합니다. 마음이 무거운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