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어 표기체계
2017년 4월 12일 카자흐스탄 정부는 자국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해 왔던 키릴 문자를 라틴 문자로 전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지 신문 '에게멘 카자흐스탄(Егемен Қазақстан)'에 따르면 나자르바예브(Назарбаев)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올해 말까지 학자, 사회단체와 협의를 거쳐 라틴문자에 기초한 새로운 알파벳과 표기법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다음날 4월 13일, 키르기스스탄 국회에서는 이마날리예브(Иманалиев) 국회의원이 기다렸다는 듯 키르기스어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라틴 문자로 전환하는 것을 제안했다. 이마날리예브 의원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2030 ~ 2040년에는 라틴 문자로 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나라의 언어 표기가 바뀐다는 것은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언어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문화, 경제, 국제 지정학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감수하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왜 최근 중앙아시아에서는 기존에 사용하던 키릴문자 체계를 벗어나서 라틴문자 체계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까?
사실 라틴문자로의 변경 문제는 현재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당시부터 논의되던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 문자체계의 변화가 심심찮게 논의되는 이유는 옛 소련 시대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 같은 어족으로서 현재 키릴문자의 영향력이 큰 나라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있다. 이들 국가는 유목민족으로서 문자가 없는 음성언어로만 사용하다가 19세기에 일부 종교계를 중심으로 아랍문자를 수용하였고, 20세기 들어서는 그 사이 지배를 받게 된 소련에 의해 라틴문자를 표기체계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돌연 1940여년 경 키릴문자 체계로 변경하였는데 이는 라틴문자를 사용하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결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앙아시아 국가의 문자 체계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짧은 시간에 수많은 변화를 겪는 기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직후 1992년부터 라틴문자 체계로 변경하였고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또한 독립 직후 탈러시아화 민족주의화를 위해 키릴문자 체계를 벗어던지고 라틴문자로 변경하려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아직도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언어가 라틴문자로의 전환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상당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소련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러시아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게다가 현재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은 유라시아 경제연합(EAEU) 가입국으로 러시아와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다. 사실상 러시아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와 동일한 키릴문자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변경을 꾀한다는 건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자르바예브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이미 2012년에 라틴문자 체계로의 변경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으나, 이듬해에 “일부에서는 문자 변경이 카자흐스탄의 지정학적 선호도 변화를 보여준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고, 라틴문자 사용은 카자흐스탄 언어와 현대화와 발전을 위한 것”이라며 러시아를 상당히 의식한 발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적극적으로 키릴문자에서 라틴문자로 변경했던 우즈베키스탄은 25년이 지난 현재 인접국 키르기스스탄과 비교할 때 러시아 이주 노동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히 뒤처지고 있다. 동일한 문자 체계 내에서 러시아어를 습득하기 쉬웠던 키르기스스탄 젊은이들에 비해 우즈베키스탄은 그만큼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인력을 배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견 탈러시아화를 위해서만 이라고는 실익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데도 왜 굳이 라틴 문자로 변경하려 하는 것일까? 이는 단순히 외적인 요소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언어 내적인 요소를 고려해야만 한다. 본질적으로 키릴문자 체계가 이들 국가의 언어와 잘 부합하지 못한다는 언어 내적인 문제 또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을 먼저 살펴보자면, 현재 키릴문자는 카자흐어 표기에 필요 없는 자소가 너무 많아 카자흐어 정자법 규칙이 복잡해졌다는 비판이 상당하다. 기존 러시아어 키릴 문자에 무려 9개나 자소를 추가하였음에도 러시아어와 음가가 동일하지 않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형편이다. 카자흐스탄 여론은 새로운 문자 체계는 음소에 자소가 일대일 대응이 되어야 하고 쓰기에 간편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키르기스스탄은 키릴 문자와 키르기스어 간에 음소의 일대일 대응이 비교적 자리 잡고 있으나 모음조화가 파괴되는 등 키르기스어 고유의 음운현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이들 국가 언어의 특성상 지금껏 거쳐 온 아랍 문자, 라틴 문자, 키릴 문자 중에서 가장 음운론적으로 부합하는 것은 라틴 문자라는 주장이 가능하며 키릴 문자 체계를 변경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필요성과 함께, 표면적으로 각국의 지도자들이 라틴문자 체계로의 변경을 꾀하는 이유는 ‘언어의 발전 및 현대화’이다. 이는 러시아어에 더 이상 지나친 영향력을 받지 않고 자국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함이자, 라틴문자를 사용하는 영어 사용국이 중심이 되는 세계적 흐름에 따라 정보전달과 수용에 뒤처지지 않고 언어, 문화, 경제적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라틴문자에서 키릴문자로의 변경이 그랬듯 다시 키릴문자에서 라틴 문자체계로의 변경은 많은 기회비용이 존재한다. 따라서 카자흐스탄과 같이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몇 십 년 후를 내다보고 계획을 마련하는 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카자흐스탄의 경우 앞으로 문자 체계의 변경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우즈베키스탄의 경우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역사적 이유로 문자 표기체제를 전환해 옴에 따라 언어 정체성에 많은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기류를 보자면 다시금 문자 체계 변경이 논의되는 시점에서 이참에 자국어를 보다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라틴 문자 체계 적극적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카자흐스탄의 문자 체계 변경 움직임이 기대되는 이유이며 키르기스스탄 또한 주변국의 언어정책 동향에 따른 귀추가 주목된다.
<참고 문헌>
1. 연합뉴스 (2017/04/12). 카자흐 대통령, 자국어 표기 키릴문자서 라틴문자로 변경 지시.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4/12/0200000000AKR20170412189451009.HTML
2. AKIpress (13 April 2017). MP proposes to shift Kyrgyz alphabet from Cyrillic to Latin. http://akipress.com/news:591207
3. Trend News Agency (13 January 2013). President: Passing from Cyrillic to Latin alphabet does not testify to Kazakhstan’s geopolitical preferences. http://en.trend.az/casia/kazakhstan/2107582.html
4. 김상철 (2013).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어 표기체계 변경 발표의 의미와 시사점.
5. 김보라 (2016). 중앙아시아어의 키릴문자 표기체계 비교연구.
6. 김보라 (2015). 키르기스어 표기체계 및 외래어에 나타나는 러시아어적 요소와 언어정체성. 슬라브학보, 30(2), 4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