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만 알아도 살만한 나라? 키르기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외래어 사용 실태

by 별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 머물면서 제일 놀랐던 것


그중 하나가 바로 언어다. 육 개월 전 처음 이 나라에 도착해서 봉사단원 활동을 위해 키르기스어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들리는 말은 온통 러시아어뿐이었다. 상점에 진열된 물건들은 영어 하나 없이 러시아어였고 음식점에 가도 시장에 가도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키르기스어로 물어봐도 다 알아듣고 러시아어로 답하는 수준이었다.


왜 키르기스어를 쓰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키르기스인인데도 불구하고 집에서 러시아어만 쓰며 자랐다는 친구 아이술루. 그녀에게 물어봤더니 “러시아어를 쓰면 유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란다. 답답하기도 하고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왜 키르기스 사람들은 키르기스어를 안 쓰고 러시아어를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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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키르기스스탄이 CIS(독립국가연합) 중 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22년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성립한 이후로 1991년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약 칠십년 동안 러시아어를 써 왔던 나라다. 독립국 선포 직전 탈러시아 화를 위해 키르기스어만 국가어로 인정하는 법안이 발효되었으나 고학력 러시아인들이 대거 러시아로 이주하는 바람에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판단, 결국 2001년 다시 키르기스어를 국가어로, 러시아어를 공식어로 인정하는 후퇴노선을 밟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러시아어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엄연한 공식어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도 지방에 가면 달라질까 기대했다.


내가 봉사단원으로 근무하는 곳은 수도에서 차로 6시간 정도 떨어진 ‘탈라스’라는 곳이다. 여기서는 가게에서나 집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다행히 키르기스어였다. 내가 배우고 익혔던 키르기스어를 마음껏 쓸 수 있겠구나 안심하던 찰나에, 간판은 러시아어와 키르기스어를 병행해서 쓰고 있었고, 식당 메뉴도 여전히 러시아어였음을, 지방도 러시아어의 영향이 크다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 일상대화는 키르기스어로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어는 키르기스 어휘 속에 외래어로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조사에 따르면 70-80%의 과학기술 방면 어휘가 러시아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하지만 이뿐만 아니라 많은 일상 어휘들이 러시아어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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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키르기스스탄에 왔냐는 질문을 꽤 많이 들었다. 처음에 나는 배웠던 대로 키르기스어로 “Жетинчн айы(제틴치 아이으; 11월)에 왔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다. 결국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어 가며 11월이라고 말씀드리니 그때서야 “아~ Ноябрь(나야브르; 러시아어로 11월)”라며 이해하셨다. 달을 가리키는 어휘를 키르기스어로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고 이제는 나도 러시아어로 쓰고 있다.


러시아어 외래어를 모르면 종종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한 선생님이 들고 다니는 가방을 칭찬하고 싶어 “баштык(바슈특; 가방) 예뻐요”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재미나다는 듯 나를 보며 웃었다. 게다가 교무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붙잡고 내가 가방을 “바슈특”이라고 말했다는 걸 소문내는 것이다. 다른 선생님들도 다들 한바탕 웃고 나서 말씀해주시건대 일반적으로 쓰는 말은 외래어인 “сумка(숨까; 러시아어로 가방)”라고 하셨다.


수업시간에도 당혹스러운 일이 왕왕 있었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의자’라는 한글을 설명하는데 한 학생이 “스툴”이라고 말했다. 키르기스어로 “отургуч(오뚜르구취; 의자)”는 아니지만 하도 많이 써서 알고 있는 외래어 “стол(스톨; 책상)”을 말하는 건가 보다 싶었다. 그게 아니라 의자라는 걸 알게 하려고 교실 의자를 가리키며 반복했다. 그런데 자꾸만 “스툴, 스툴”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의자를 러시아어로 “стул(스툴)”이라 한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설프게 외래어를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외래어고 무엇이 키르기스어일까?


많이 쓰이는 외래어를 아는 것도 좋지만 키르기스어 고유어를 더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라도 외래어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했다.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글자로 판단하는 법이다. 우선 러시아어에는 없고 키르기스어에만 있는 글자가 세 개 있다. ‘Ө, Ү, Ң’ 이 글자들이 들어가는 단어는 순수 키르기스어라고 볼 수 있다. 또 키르기스어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러시아어에만 있는 글자 ‘В, Ф, Ц, Щ’가 들어가는 어휘는 외래어이며, ‘Ь, Ъ’와 같이 음가가 없는 부호는 순전히 러시아어 표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남겨둔 것으로써 이 글자가 들어간 어휘 또한 외래어이다.


이는 구어였던 키르기스어가 소련에 의해 키릴 문자를 차용하게 되면서 음운과 글자와의 연계성이 부족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키르기스스탄으로 독립되고 난 후의 정자법 개정 방침은 키르기스 고유의 음운체계를 최대한 반영했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2008년의 정자법 개혁은 다시 러시아어 원어 표기에 충실한 외래어 표기로 회귀해 버렸다. 그 결과 모음조화가 탈락하고, 연음부호가 유지되는 등 키르기스어 고유의 음운현상이 파괴되고 변형되어 버렸다. 이는 오로지 키르기스어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러시아어 외래어를 쉽게 표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키르기스어에는 외래어가 참 많다.


이젠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러시아어를 통해 많은 경우 외래어로 편입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такси(탁시; 택시)’, ‘телефон(텔레폰; 휴대폰)’, ‘футбол(풋볼; 축구)’, ‘аэропорт(에어로뽀르트; 공항)’ 등이다.

처음에는 키르기스인인데도 불구하고 키르기스어를 잘 모르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면서 각종 일상용어도 외래어가 대부분인 키르기스어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서양에서 들어온 문물을 표기하기 위해 외래어를 사용하는 건 그렇다 치고 왜 멀쩡한 자기 나라 언어를 쓰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잠깐, 나의 한국어 수업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키르기스 학생들에게 한글 단어를 설명하면서 낱말카드를 활용했다. ‘컵, 컴퓨터, 텔레비전, 버스, 오토바이...’ 이 말들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이들이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영어에서 나온 외래어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나중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몇몇 아이들이 “선생님, 디자이너는 한글로 뭐예요?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뭐예요?”라며 다시 질문해왔다. 나는 “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똑같이 말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외래어를 설명하는 일이 잦아지자, 나는 이실직고해버렸다. 키르기스어에 러시아어가 많은 것처럼 한국어에는 영어가 많다고.


한국어에는 서구계 외래어뿐만 아니라 한자어도 있다. 한자어는 외래어라기엔 이미 너무 우리말 속에 동화돼 버려 별개의 ‘한자어’라는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형편이다. 키르기스어로 거의 쓰지 않는 달 어휘나 각종 음식 어휘 등 러시아어는 아마 우리나라의 한자어와 비슷한 위치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섣불리
키르기스인들이 고유 키르기스어를 대하는 태도를 폄하할 수가 없다.


유목민으로서 언어를 표기할 문자조차 변변치 않았던 키르기스인들은 소련 지배 아래 러시아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자기네 언어도 러시아어와 같은 키릴문자를 차용하여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아랍 문자와 라틴 문자를 비교적 짧은 기간 사용했다.) 소련 이후에는 서구 문물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수많은 외래어가 들어왔지만 이것은 사회의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언어 수용의 결과였다.


아직도 많은 키르기스인이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쓴다. 소련 시대를 살았던 어른 세대가 여전히 러시아어를 일상 속에서 사용하며 아이들은 러시아어를 듣고 배운다. 문화적으로 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도 키릴문자를 사용한다는 러시아어와의 동질성 때문에 배우기 쉬운 것이 러시아어다. 결국 키르기스어 속에서 러시아어는 단순히 외래어로 보기 힘들 정도로 언어 전반적으로 뿌리 깊게 남아있게 되었다. 고유 키르기스어를 보전하기 위해 외래어를 구분해서 아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특성을 알고 키르기스어 속에 녹아든 수많은 외래어를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걸 이젠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참조 논문 -
김보라 (2015). “키르기스어 표기체계 및 외래어에 나타나는 러시아어적 요소와 언어정체성”. 슬라브학보, 30(2), 4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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