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암살 요원 출신의 살인 청부업자 인남(황정민)은 일본 조폭 고레다를 죽이는 것을 끝으로 킬러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그간 모은 돈으로 파나마 해변에 집을 사서 여생을 보낼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에게 평화롭고 한가로운 일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태국에서 인남의 아이를 혼자 낳아 기르던 옛 연인 영주가 돌연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고, 그녀의 9살 난 딸은 방콕에서 납치된 뒤 행방이 묘연하다. 이를 알게 된 인남은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다.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살해 대상이었던 고레다의 동생, 레이(이정재)가 형의 복수를 위해 사방에 피를 뿌리며 인남의 뒤를 쫓는다. 인간 백정으로 불릴 만큼 잔인한 레이의 집요한 추격을 받으며 인남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딸, 유민이를 구하기 위해 태국으로 향한다.
‘띵작’이 될 상인가?
<신세계>의 브라더즈, 이정재와 황정민의 영화 크랭크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설렌 영화 팬들이 많았을 것 같다. 나 역시 범죄와 폭력 세계를 주제로 한 누아르(noir) 영화를 특히 좋아하기 때문에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신세계> <범죄 도시> <아수라>에 이어 나의 최애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띵작’이 탄생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하드보일드 액션극’을 표방한 만큼 액션 신에 초점을 두고 본다면 꽤나 볼 만한 장면들이 많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프레임을 나눠서 촬영하는 ‘스톱 모션’ 촬영 기법을 사용해 리얼한 타격감을 살렸다고 한다. 격렬한 액션에 묻히기 십상인 배우들의 표정 연기가 그토록 생생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스턴트 없이 두 배우가 직접 소화한 특급 액션 신은 그야말로 눈 호강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인남과 레이가 처음으로 조우하는 장면에서는 팽팽한 긴장감과 살벌한 살기가 화면 밖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대사 한 마디 없이 표정과 눈빛만으로 화면을 압도하는 두 배우의 명품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 장면에서 딱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설정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인남과 레이의 첫 번째 결투 이후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러닝 타임이 108분으로 길지 않은 편에 속하는 데도 불구하고, 중반부터 ‘과도한 액션’으로 인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서사의 개연성 부족 때문이라고 나름 이유를 생각해본다.
액션에 중점을 둔 영화라는 건 알지만 그럴듯한 스토리가 뒷받침되지 않는 액션은 공허했다. 주먹질, 발길질, 칼질, 총질 그리고 마지막에는 수류탄까지. 가공할만한 각종 액션과 무기가 등장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까지 싸워야 할까 하는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레이, 왜 인남을 쫓나?
고레다의 장례식장에 하얀색 옷을 입고 카리스마를 뿜으며 나타난 첫 등장부터 일본식 억양이 섞인 한국말, 빈틈없는 액션까지 이정재 배우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이정재 배우는 최근에 맡았던 <사바하>의 박 목사나 <신과 함께>의 염라대왕의 모습을 완전히 지우고, 사람의 배 가르기를 즐긴다는 인간 백정, 레이의 잔혹한 모습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다.( 배우가 엇비슷한 배역을 맡아 이미지가 굳어지거나 전작에서 보여줬던 연기를 뛰어넘지 못할 때 '배역'보다 '배우'가 더 강하게 부각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는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반면, 레이의 행동은 설득력이 약했다. 그는 왜 모든 것을 걸고 인남을 추격하게 됐을까? 영화에서는 ‘편집증 환자라서 꽂히면 눈에 뵈는 게 없다던데’ ‘내 형을 죽인 놈이야 내 손으로 끝장을 봐야지’ 등의 대사를 통해 레이의 캐릭터를 설명한다. 하지만 레이는 형인 고레다와 한동안 연을 끊고 지내 주변에서 아무도 형제인지조차 몰랐다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열일 제쳐두고 형의 복수에 매달린다?
그가 아무리 편집증이라고 해도 방콕까지 쫓아가서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까지 인남을 죽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인남에 대한 레이의 '멈출 수 없는 추격'은 영화의 동력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스토리인 만큼 보다 촘촘한 서사가 뒷받침됐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인남에 대한 추격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방콕의 조폭 두목 란이 레이에게 왜 그렇게까지 놈(인남)을 죽이고 싶어 하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레이는 ‘I don′t remember anymore’라고 답한다. 심각한 분위기였지만 이 장면에서 나는 실소했다. 왜 죽이려고 하는지 더 이상 기억도 안 난다는 레이의 자조 섞인 답이 과도한 액션에 대한 겸연쩍은 변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유이, 왜 인남을 돕나?
인남의 조력자 트랜스젠더 유이를 연기한 박정민은 정말 어메이징 한 배우다. 영화에 박정민 배우가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보다가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중간에 유이가 구치소에 하룻밤 갇혀 있다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새 코밑에는 거뭇한 수염이 올라와 있다. 성전환 수술 전에 호르몬 주사만으로 여성의 성을 유지하는 트랜스젠더의 모습을 정말 실감 나게 재현해낸 것이다. 예전에 태국에서 봤던 실제 트랜스젠더와 너무 흡사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보여줬던 서번트 증후군의 피아노 천재 진태와 함께 유이도 오랫동안 회자될 것 같다.
이제 개연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방콕에서 딸을 찾아 헤매는 인남에게 유이는 ‘내가 오빠 돈 때문에 도와주는 거 같아요? 내가 뭐 하나 보여줄까?’라며 자신이 한국에 두고 온 다섯 살짜리 아이 사진을 내민다. 그런데단지 그것뿐이라고 하기엔 좀 미흡하다.
유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처한 인남을 여러 번 구해주고 유민이도 떠맡는다. 그런데 그(그녀?)가 치러야 할 대가는 목숨일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단지 부성애(모성애?)에 대한 공감이나 성전환 수술에 필요한 돈 때문에 인남을 돕는다는 설정에 공감이 가지 않았다. 인남과 유이 두 사람 사이에 좀 더 끈끈한 인간애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줬더라면 유이가 인남이 남긴 돈을 갖고 유민이와 파나마로 떠나는 마지막 결말도 그렇게 뜬금없다고 생각되진 않았을 것 같다.
(한편으론 인남이 한국을 떠난 8년 동안 살해 대상자 외에는 인간관계가 전무했기 때문에 마지막 돈과 메시지를 남길 유일한 사람이 유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인남은 악에서 구원받았을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인남은 순식간에 6명을 살해한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악질 중의 악질’이라는 고레다를 비롯해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최소한 괴롭힌 전력이 있어 보이는 조직 폭력배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걸 그도 안다. 일상의 행복을 누릴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고, 무감정으로 무장한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인남이 고레다의 시체와 마주 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살인을 멈추기로 했지만 지금까지 행해온 악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지, 고뇌하는 그의 옆모습에서 짙은 피로감과 고독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국정원의 암살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조직이 와해되면서 내쳐진 아픔이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청부 살인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이유로는 충분치 않다. 살인을 그만두고 파나마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존재조차 몰랐던 자신의 딸이 범죄 조직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딸을 구하러 떠난다는 스토리도 다소 진부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라는 레이의 마지막 대사처럼 인남에게 새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예측도 가능했다. 이처럼 영화에는 많은 클리셰가 등장한다.
하지만 황정민이 누군가.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열연이 무감각하고 냉혹한 '하드보일드 액션극'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스토리의 식상함도 다소나마 상쇄시킨다. (개인적으로는 선의의 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역할보다는 <신세계>의 정청이나 <아수라>의 박성배처럼 똘끼 충만하고 사악한 악역을 맡았을 때의 연기가 훨씬 더 좋았다는 생각이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인남은 레이가 타고 있던 차에 수류탄을 터뜨린 후 안간힘을 다해 딸이 들어 있는 트렁크를 끌어안고 구른다. 폭발이 멈춘 후 가방을 열어 아이를 품에 안고 절규하며 그간의 ‘하드보일드’한 무감각함을 버리고 응축됐던 감정을 부성애로 폭발시킨다. 가까스로 유민이를 탈출시킨 후 레이의 칼에 난자당한 인남은 유이의 품에 안겨 멀어지는 유민이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 순간 그를 악에서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부성애를 통한 인간성의 회복이었을 거라 짐작해본다.
(이 장면에서 인남은 안도감, 안타까움, 그리움, 슬픔, 허탈감, 포기 등의 여러 감정이 혼재된 표정을 짓는다. 앞뒤 스토리의 개연성 여부를 떠나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가~암~동! 그런 표정을 그와 같이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도 놓칠 수 없는 이정재와 황정민의 조합
지난해 영화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그즈음 갑자기 바빠지는 바람에 극장에서 못 보고 얼마 전 티*을 통해 보게 됐다. 오랫동안 벼르다가 봐서 기대가 너무 컸는지 그만큼 실망도 컸다. 극장의 큰 화면으로 봤다면 그나마 볼만했을 것 같아 많이 아쉽다.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에서 스토리의 개연성은 장르의 미학을 완성시키는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걸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서사가 충분한 개연성을 획득한 순간, 배우는 작은 손짓만으로도 큰 임팩트를 줄 수 있으며 관객은 큰 몰입감과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
정리하면, 액션 신은 좋았지만 몰입감은 떨어지는, 절반의 성공에 그친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다만, 전반적인 개연성 부족에도 불구하고 이정재, 황정민, 박정민 세 주연 배우가 펼치는 연기의 진검 승부는 놓치기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