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욕심을 거스르고 현상을 바라본다.

부지런하면 일찍 지친다. 게으름을 피워보고 욕심을 비운다.

by 언진


또 일곱 시면 눈이 떠진다. 출근할 때는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하던 버릇이 멀리 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헬스장에서 보내는 아침 루틴을 건너뛰고 게으름을 부려보기로 한다. 벌써 커피를 끊은 지 한 달이 넘었었다. 어제 마신 말차라테가 과했는지 평소보다 늦게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개운하지 않았다. 평소엔 말차파우더 두 번을 넣은 라테를 마시는데, 진하게 마시고 싶어 한 번을 더 추가했더니 불편함이 생겨버린 것이다. 기지개를 켜고 발가락부터 몸을 깨운다.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핸드폰으로 아침 뉴스를 살핀다. 핸드폰 액정화면은 벌써 여덟 시를 가리킨다. 이 시간이면 근력 운동을 마치고 유산소를 할 시간인데, 내가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 건지..라는 마음이 한편에 들었지만, 내 여유는 내가 챙기고 욕심은 조금 접어두자는 마음을 굳힌다.


일상에서도 더 좋은 선택을 한다는 욕심을 버린다.

어제는 연희동 사러가마트에서 연어 200g, 레몬, 방울토마토와 딜을 구매했다. 연어는 생으로 먹을 요량이었으나, 최근에 노로바이러스에 걸린 까닭에 횟감이 아닌 것 같아 접어두기로 하였다. 마트를 나와 물어볼걸 그랬나, 생각했지만, 일상에서도 더 좋은 선택을 한다는 욕심을 버린다. 대파와 생크림을 넣고 파피요트를 할지, 차자키 소스를 만들어서 빵과 함께 먹을지 고민했지만, 생각을 그대로 두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나는 입맛은 까다로운데 요리를 잘하지 못할뿐더러, 생선요리는 원물이 신선하면 요리의 목적을 이루기 때문에 레몬, 올리브유, 가염버터, 딜만 넣기로 하였다. 덜고 덜어내 보면 욕심도 함께 사라지리라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욕심과는 먼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을 살핀다.

나는 관계에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읽곤 한다. 그의 수필은 할아버지 다락방에서 먼지 묻은 책을 꺼내어 읽는, 오래되면서도 소중한 느낌을 선사한다. 고대와 2차 세계대전, 서유럽의 문화와 일본의 근대 문학의 정수를 찾아서 너무나 모자란 지식을 가진 나에게 지적 유희를 선사한다. 키냐르는 음악가이기도 하며, 나 또한 그를 조르디 사발의 음악을 통해 글을 찾다가 어찌저찌 알게 되었다.

키냐르가 현대를 배경으로 그린 두 인물, 안[빌라 아말리아(1)]과 클레르[신비한 결속(2)]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기보다, 관계를 축소함으로써 ‘스스로’에 도달하는 인물들로 읽힌다. 안은 자신이 소유한 것과 작곡가로서의 직업적 명성, 사회적 연결을 스스로 해체하며 섬과 바다로 이동한다. 이러한 결단은 상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라기보다, 욕망의 구조에서 이탈하려는 선택에 가깝다. 관계를 끊음으로써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클레르 또한 어린 시절에 살던 곳으로 이주하며, 기존에 느슨하게 유지한 관계들이 가까워지는, 신비한 결속을 마주하게 된다.

이 두 인물에게 ‘스스로가 된다’는 것은 초개인화 사회에서 추구하는 욕망을 통해 자아를 강화하는 과정과는 멀다. 오히려 욕망을 비워내고, 관계의 과잉을 덜어내며, 타인의 인정 체계에서 한 발 물러서는 일이다. 두 인물이 자신을 유지하고, 관계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비움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욕심을 줄일수록 존재는 외부의 규정에서 벗어나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리듬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상과 나를 분리시킨다. 나는 사건에 끌려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내게 돈과 명예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격려할 수 있고 신뢰로 이어진 관계를 쌓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장의 이익을 위한 눈속임, 시기, 질투가 난무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에는 내가 너무 순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도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고, 내게 약속한 조금의 사례조차 나의 퇴직 이후 없던 것으로 만들었지만, 악의적인 린치를 당하지 않을 만큼은 노련하게 대처했다는 것에 만족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내 탓도, 그 결정권자의 탓도 아닌 그저 환경이 만든 어떤 굴레라고 생각해 본다. 엮여있는 주변 이들에게 이 상황을 토로해 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내 욕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간에 내 주변을 가꾸기 위해 고민하는 게 나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내 절대적인 이익을 지켜야 한다‘, ’억울함을 호소해야 한다‘라는 외부의 정의가 아닌 나만의 리듬을 회복하기 위해 숨을 들이켜본다.


(1) 파스칼 키냐르, 『빌라 아말리아』,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2) 파스칼 키냐르, 『신비한 결속』,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