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술탄을 위한 그림을 그리다가 끝내 눈이 먼다

이슬람 세밀화@우즈베키스탄 부하라

by 구디너프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오스만 제국 궁정 화원의 세밀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스만 제국이 쇠락해 가던 시기에 베네치아 공국 등 서방의 문물이 유입된다.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작업하던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가들에게도 서양 화법이 유입되고 이를 받아들일지 배척할지를 두고 갈등과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소설은 범인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거기에 로맨스를 더해서.


자신만의 화풍이나 개성은 드러내지 못하고 평생 신과 술탄을 위한 그림을 그리다가 끝내 눈이 멀고 마는 세밀화가들. 그들의 그림은 대중에 공개되지 못하고 완성되자마자 술탄의 서고로 들어가 오랜 세월 벌레와 습기, 전쟁 등으로 서서히 파괴되어 간다. 이런 그들 앞에 서양 화법이 들이닥친다. 인간 중심의 그림, 화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과 신을 배반했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그들을 갈등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신념이 발밑에서 스러져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들이 안타까워 책을 읽는 내내 많이 슬펐다.


소설을 읽으며 언젠가 이슬람 문화권으로 여행을 가면 세밀화를 한 점 사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 부하라에 가게 됐다. 부하라는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중 하나로 옛날부터 중국과 서역으로 문물이 오가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였다. 인도의 모직과 중국의 비단이 부하라를 통해 서역으로 흘러갔다.


부하라의 시장에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의상, 카펫, 그릇 등을 파는 가게와 함께 세밀화를 파는 가게도 늘어서 있었다. 현대의 세밀화가들은 조명 아래 관광객의 시선을 받으며 조용히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 파리의 어느 전시회에 출품한 경험이 있다는 홍보용 전시 리플릿을 걸어놓은 세밀화가 앞에 섰다. 그에게 휴대폰으로 캡처해 놓은 이미지를 보여주며 이 그림을 사고 싶다고 했다. 그림은 <내 이름은 빨강>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슬람 문학 최고의 로맨스인 '휘스레브와 쉬린'이었다. 말을 탄 휘스레브가 목욕하고 있는 쉬린을 보고 한눈에 반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 내가 보여준 것은 이슬람 세밀화의 거장 비흐자드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는 내 휴대폰을 받아 들더니 "오, 휘스레브 앤 쉬린~" 이라고 내뱉은 후 자신이 그린 세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그림을 재해석해 현대식으로 그렸단다. 풀, 나무, 바위가 우거진 숲 속, 반짝이는 샘물에 앉아 목욕을 하는 쉬린과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백마 위의 휘스레브. 쉬린의 옆에는 그녀가 타고 온 흑마가 서 있고 나뭇가지에는 그녀가 벗어놓은 옷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사마르칸트지(종이)에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어 흥정도 하지 않고 그가 제시한 금액을 건넸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림이 구겨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포장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아마도 100달러라는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고 그대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옆에 두고 소설을 펼쳐 오르한 파묵이 묘사한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아, 휘스레브와 쉬린이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