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변검술을 하며 살아간다

변검 인형@중국 청두

by 구디너프

오래된 극장 수펑야윈에서 변검을 봤다. 변검은 배우가 다양한 색상과 표정의 검보를 여러 겹 쓰고 극의 내용과 음악에 따라 (손을 대지 않고) 검보를 순식간에 바꾸는 예술이다. 극을 보기 전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에서 만족감을 얻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공연장에 들어서니 자리마다 차와 해바라기씨가 준비되어 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씨를 오도독 씹고 있으니 공연이 시작되었다. 쓰촨 지방의 전통 춤, 흡사 서커스처럼 보이는 유머러스한 쇼, 그림자극까지 보고 나니 드디어 변검이 시작됐다.


한층 격앙된 반주 음악 아래 금칠을 입힌 화려한 복장에 붉은 망토를 두른 서너 명의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오른다. 부채를 얼굴 가까이 올렸다 내릴 때마다, 고개를 까딱 할 때마다, 발을 한번 구를 때마다 얼굴이 바뀌었다. 붉은색에서 푸른색에서, 다시 노란색으로. 검보가 바뀌는 건 1초도 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공연 중간에 배우가 무대 아래로 걸어 내려와 바로 내 앞에서 변검술을 펼치는데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음악이 고조될 무렵 "자, 잘 봐. 지금부터 나 가면 바꿀 거야"라는 뉘앙스로 손을 스윽 올려 얼굴에서 몇 바퀴 돌렸을 뿐인데 가면이 바뀌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짐승과도 같은 탄성을 내지르며 짧은 공연은 끝이 났다.


극장 안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플라스틱 변검 인형을 샀다. 검정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쓴 모습은 변검 배우와 똑같다. 하나 다른 건 모자 위에 빨간색 버튼이 달려 있다는 것. 버튼을 누르면 부채를 든 손이 얼굴을 가리고 버튼을 떼고 나면 얼굴이 바뀌어 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검은색... 색상과 함께 표정까지 바꾸는 멋진 인형.


변검 인형은 서재에 놓여 있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아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한때 마음이 복잡할 때면 서재에 앉아 빨간 단추를 똑딱거리며 싸구려 플라스틱 인형이 만들어내는 변검 마술 쇼를 보곤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얘는 나를 닮았다. 아니 우리를 닮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페르소나라는 것, 그게 이 변검의 가면 아니겠는가? 여러 개의 가면을 갖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알맞은 것으로 바꿔 쓰며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변검 인형인 것이다.


<철학이라 할 만한 것>에서 오시이 마모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단 하나의 인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단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몇 개의 얼굴을 적절히 구분해서 쓰고 있으며 그것이 가능할 때 인생을 잘 헤쳐나갈 수 있다. 인간은, 두 얼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사회적인 자신, 가족과 있을 때의 자신, 고유시 속의 자신. 이 세계의 층을 교차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기 바란다. 고유시에 인간은 진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설사 당신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일을 해도, 익숙지 않은 사풍 속에서 무리를 하며 일한다고 해도, 그런 점이 당신에게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당신이라는 인간은 부서지지 않는다. 진짜 당신은 그런 곳에 없기 때문이다.(61-72쪽.)


위로가 되는 말이다. 나는 회사에서 사회적 가면을 쓰고 앉아 있을 것이다. 그 가면을 쓰고 있을 때의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다. 진짜 나는 고유시 속에 있을 테니. 그곳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진짜 나는 파괴되지 않는다...고 되뇌며 오늘도 변검 인형을 똑. 딱. 똑.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