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배낭을 메고 터덜터덜 걸어도 충분한

냉장고 자석@콜롬비아 카르타헤나

by 구디너프

에콰도르에서 여권, 노트북, 카메라 등 귀중품을 모두 털렸다. 그 상실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금 그때를 다시 회상해도 여전히 가슴이 아리다.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여권을 재신청했고 여권이 에콰도르에 도착하기까지 한 달 즈음을 쉬었다. 수도 키토에 있는 한인민박에서 먹고 자고,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여행도 하며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여행을 재개하면서 무슨 오기에서였는지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지 않았다. 카메라 없이 여행을 이어갔다. 에콰도르에서는 한인 민박 사람들 덕분에 당시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다음 여행지인 콜롬비아였다.


상실감이 치유되지 않았던 걸까. 흥이 나지 않았다. 어딜 가도 뭘 봐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치안이 좋지 않은 보고타의 경비는 삼엄했고 별 특징 없는 도시 메데인에서는 자주 비가 내렸다. 그 와중에 박물관에 가서 보테로 그림도 보고, 후안 발데스 커피도 마시고, 패러글라이딩도 했으나 마음은 내내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 기분은 카르타헤나에 가서야 풀렸다.


카르타헤나는 스페인 식민 시절에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곳이다. 스페인 인(이라 쓰고 놈이라 읽는다.)들이 볼리비아, 페루 등지에서 채굴한 금, 은, 광물 등을 스페인으로 가져가기 위해 사용했던 항구 도시. 그래선지, 아니면 카리브해에 위치한 도시여서인지, 카르타헤나는 콜롬비아의 여느 도시들과 분위기와 냄새가 달랐다.


색색깔로 알록거리는 구시가의 거리, 집집마다 달아놓은 아름다운 발코니, 어딘가 들떠있는 축제 전의 분위기가 감도는 도시였다.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아니라면 해적의 침입이 잦았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태평한 마을이었다. 사진으로 담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빈손으로 나갔다가 빈손으로 홀홀 돌아오는 자유도 나쁘지 않았다. 푹푹 찌는 날씨 속에서도 카르타헤나가 많이 좋았다. 땀이 줄줄 흘러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를 해야 했다. 샤워시설이라곤 벽에 뚫려있는 오백 원짜리 크기의 구멍에서 나오는 굵은 물줄기가 전부였는데, 그 앞에 서서 물을 맞을 때마다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되는 느낌, 잃어도 나쁘지 않은 느낌, 빈 배낭을 메고 터덜터덜 걸어도 충분한 느낌... 이 도시를 기념할 단 한 장의 사진도 없는 상황에서, 고심해서 고른 이 냉장고 자석에는 그런 느낌이 담겨 있다. 다른 사람이 볼 땐 특색 없고 예쁘장한 사진 한 장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