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 15분 도서관

커버 사진 @ 헬싱키대학도서관

by 구디너프

영국엔 애프터눈 티(오후 3시에서 5시경에 차와 다과를 곁들인 가벼운 식사)가 있고 스웨덴에는 피카(일에서 벗어나 잠시 쉬며 커피 또는 차와 함께 쿠키를 마시는 시간)가 있다면 나에겐 3시 15분 자료실 타임이 있다.(대만의 3시 15분 밀크티를 참고했다. 그런데 3시 15분 밀크티는 정말 3시 15분에 마셔야 할까?) 점심 식사 후 3시가 넘어가면 이제 그만 하던 일에서 벗어나 잠시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건 세계적 룰이다. 나는 그 시간 자료실로 간다. 휴게실이 있기는 하지만 가 봐야 송장처럼 누워있기밖에 더 하겠는가.


자료실에 가서 하는 일은 어슬렁거리기.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새로 들어온 책과 다른 사람들이 방금 반납하고 간 책을 살피고 큐레이션 코너도 둘러본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여성 작가라는 주제의 큐레이션을 하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유럽의 근대 미술 큐레이션을 하고 있고. 새로 들어온 책과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책 코너도 돌아본다. 하지만 그 작업은 금방 끝이 나고 더 이상 볼 책이 없어진 나는 서가 사이를 걷는다. 내가 주로 가는 곳은 인문과학실. 철학, 종교, 언어, 문학 책들이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한국문학, 또 그중에서도 잡문 코너로 간다. 잡문은 에세이와 비슷한데 수필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아마추어나 초보 작가들이 쓴 수기와 일기문 등을 말한다. 그래서 형식이 엄격한 수필보다 주제도, 문장도 더 자유분방하다. 서가에 꽂힌 책들의 제목과 대화를 나눈다.


하늘은 나를 향해 열려 있어 - 응, 좋겠다. 나를 향해서도 좀 열려 있었으면…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 아, 내가 평생 바라던 거였는데…

어른의 관계에는 마침표가 없다 – 나는 자주 마침표를 찍는데 그럼 어른이 아닌 건가?

밤에 들려주는 예쁜 말 – 낮에도 예쁘게 말해주면 안 될까?

어쨌든 즐겁게 살겠습니다 – 나도요

아주 잘 노는 어른이 될 거야 – 나는 아주 잘 노는 할머니가 될 거야

40세 정신과 영수증 – 얼마나 힘들었을꼬…

비효율의 사랑 – 효율적인 사랑이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

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 – 그게 어딘데?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 오, 이건 외워야 할 삶의 철학이다 3단 3단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 나도 늘 이 세상과 불화하며 살았는데…


제목을 훑는 일에도 질리면 두꺼운 책을 골라 315쪽을 열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한쪽씩 읽어 본다. 오늘은 <금서의 역사>(베르너 풀트, 2013년, 시공사)다. "조작된 억압. 폐허에서 솟아난 새로운 인간은 허위의 탄생이었다. 나치 정치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공산주의자들이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새 국가 건설 신화에 반파시스트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맥락이 없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다른 책으로 넘어간다. <어둠에 새기는 빛>(서경식, 2024년, 연립서가)을 펼친다. "아직 '제정신'을 지키려는 사람이 가까스로나마 살아남아 있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노예가 제 몸에 박힌 노예근성을 극복하기 어렵듯이, 노예 주인은 고통스러운 자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주인의 심성을 버리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다." 아, 내가 제정신을 지키기 어렵다. 책을 잘못 고르면 빈면이나 참고문헌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놀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흐른다. 아니 벌써 30분이나 지났단 말이야? 소스라치게 놀라 사무실로 달려가면서 혹시 들어올지 모를 “자리를 오래 비웠네요?”라는 추궁에 대한 변명을 만든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노동 시간이 길다고 해서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솟구치고 업무 효율이 높아지는 건 아니잖나요? 인터넷 검색창에 휴식과 생산성이라는 키워드를 한 번 쳐보세요. "집중력과 생산성을 무한대로 늘려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틀렸어요. 그런 생각은 우리를 자멸로 이끌 거예요."라거나 "생리학적으로 '휴식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자신을 밀어붙이면서 사고의 피로를 쌓아둘 때, 우리 몸은 만성적으로 미세한 스트레스를 받아요."와 같은 말들이 넘쳐나요. 한때 사서로도 일했던 미국 작가 헨리 밀러의 11가지 글쓰기 계명에도 나와요. 글이 안 풀린 땐 과감하게 원고에서 손을 떼고 ‘늘 인간답게,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곳에 다니고, 내킨다면 술도 마셔라.’고. 제가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실에 다녀오는 것이 더 현명하고 적합한 방법이 아니겠어요?


아무튼 오늘도 잘 쉬었다. 과열된 머리에서 열이 나서 좀 쉬고 싶은데 쉴 수 있는 공간이 사무실 앞 테이블과 간이 좌석뿐일 때, 기껏 모니터에서 머리를 돌려 눈을 옮긴 곳이 작은 스마트폰 화면일 때, 내 마음 어디선가 서러운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다. 모 기업처럼 골프, 수영, 헬스, 오락, 야구, 축구, 하키... 심지어 낮잠까지, 모든 활동을 할 수 있는 직원용 복지 공간을 마련하는 건 가능하지 않지만, 10평(작은도서관 설치 기준) 규모의 작은 자료실이라면 어떤가. 보르헤스의 말마따나 도서관은 우주이니까. 도서관은 미술관이 될 수도, 과학관이 될 수도 있고, 또 캠핑장이 될 수도 있다.(진짜? 일단 던지고 보자.) 적은 비용으로 우주를 만드는 이런 획기적인 일을 모두가 앞다투어 실행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은 마을의 도서관이었다는 출처 없는 빌게이츠의 문장이 돌아다니는데(진짜 빌게이츠가 한 말은 맞을까?) 나도 언젠가 유명해지면 그 시절 쏟아지는 폭력적인 업무로부터 나를 지킨 것은 자료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 그런 말을 할 사람들이 부디 많아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