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의 전략
1597년 가을, 일본이 다시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 정유재란.
7월, 칠천량 앞바다에서 우리 수군은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왜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거북선을 포함한 수백 척의 전선이 불타거나 가라앉았고, 통제사 원균과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의 자랑이던 수군 전력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백의종군을 명 받았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명예회복이 아니라 패배의 잔해 뿐이였다. 남은 전선은 고작 12척. 거기에 이순신 자신의 기함 1척을 더해 겨우 13척이었다.
9월, 진도 울돌목. 명량 앞바다. 이순신 앞에 놓인 패는 최악이었다. 전선 13척. 상대는 133척. 10배가 넘는 전력 차이였다. 그 앞에서 누구라도 "이건 죽은 판"이라 생각했다. 부하 장수들도 육지로 올라가 육전을 펼치자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그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말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바다를 포기할 수 없었다. 바다를 내주는 순간, 왜군은 서해를 장악하고 한양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후퇴는 곧 나라의 멸망을 의미했다.
명량에서의 일전이 포커와 같은 성격이었다면 어땠을까? 이순신은 블러핑으로 왜군을 속이거나, 일찍 폴드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이순신 같은 탁월한 전략가라면 상대의 심리를 읽고, 베팅으로 압박하며, 때로는 허세로 상대를 물러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주어진 게임은 포커가 아니었다. 고스톱처럼, 중간에 포기할 수 없는 판이었다. 피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 반드시 끝까지 가야 하는 싸움이었다. 포기는 곧 패배를 의미한다. 그는 받은 패를 바꿀 수 없었다. 13척이라는 절망적인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내는 패를 정교하게 계산한다. 울돌목이라는 좁은 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했다. 이곳은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대규모 함대가 한꺼번에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넓은 바다에서라면 수적 열세가 치명적이지만, 좁은 울돌목에서는 왜군의 숫자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이순신은 일자진을 형성했다. 13척의 전선을 한 줄로 세워 좁은 해협을 막아섰다. 가장 중요한 것, 조류가 바뀌는 타이밍을 기다렸다. 물살이 왜군 쪽으로 흐를 때는 버티고, 조선 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순간을 노렸다. 포커처럼 베팅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판을 유지하며 확률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왜군의 선봉이 좁은 해협으로 밀려들어왔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적선들. 조선 수군은 흔들렸지만 이순신의 기함은 꿋꿋이 버텼다. 화포가 불을 뿜었고, 화살이 빗발쳤다. 격전이 이어졌다. 마침내 적장 구루시마의 배가 가까이 접근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조선 수군의 화살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구루시마의 목이 베어졌고, 이순신은 그 목을 배의 높은 곳에 매달았다. 왜군 함대 전체가 볼 수 있도록. 자신들의 선봉장이 죽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도록. 높이 매달린 그 목을 본 왜군의 사기가 꺾였다. 수적 우위를 믿고 밀려들던 왜선들이 혼란에 빠졌다. 조류가 바뀌었다. 물살이 왜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기세를 올려 맹렬히 공격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다. 조선 수군은 31척을 격파했다.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이순신은 이겼다. 베팅이 아닌, "끝까지 가는 힘"으로. 불가능한 확률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싸운 의지로.
사실 이 에피소드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기에, 조금은 식상할 수도 있어서 이 에피소드를 차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오래 했었다. 같은 듯 다른 고스톱과 포커의 게임성 차이를 역사적 사례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는 명량해전의 이야기만한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고스톱에 프로가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게임성의 차이다. 같은 웹보드 카드 게임 장르이지만 포커는 세계적인 게임이자, 심지어 프로 갬블러도 있다. 고스톱은 반면에 국내 한정이고 프로 고스톱퍼(?) 같은 건 없다. 맞고를 포함한 일명 고스톱류에는 베팅의 개념이 없다. 단지 판의 규모(점당 얼마)만 정해져 있을 뿐, 나머지는 전적으로 받는 패와 내는 패가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물론 고스톱에도 실력의 우위는 존재한다. 전략적으로 또는 확률에 따라 어떤 패가 나올지 계산하거나 상대가 어떤 족보를 노리는지 예측해야 한다. 내야 하는 패가 초출(해당 판에 처음 내는 패)인지 정도 보는 것은 기본에 가깝다. 상대방이 큰 금액을 딸 것으로 예상되면 실제 고스톱에서야 냅다 판을 엎어버리면 되겠지만 온라인에서는 중간에 포기할 수 없다. (랜선을 뽑아버리면 컴퓨터가 알아서 해당 판의 끝까지 진행하고 해당 계정의 게임머니를 곱게 차감해 간다)
그러나 포커는 다르다. 블러핑, 일명 "뻥카"가 가능하다. 내가 무슨 카드를 들었는지와 관계없이, 베팅을 통해 상대가 게임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반대로 전략적으로 게임을 빨리 포기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도 있다. 섯다, 도리짓고땡처럼 화투를 활용해서도 충분히 베팅 가능한 게임을 할 수 있지만 프로섯다 게이머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대체재(포커)가 더 심플하고 더 널리 퍼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팅의 개념이 없다는 것은 고스톱이 명절 가족 놀이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스톱에 프로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성이 있다는 것이고, 이 사실은 게임회사에게 일종의 양날의 검이 된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누구나 쉽게 그만둘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유료 멤버십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고스톱과 포커 등의 게임을 즐기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유료 멤버십도 한 달 단위로 갱신하고 결제를 중단해버리면 그만이라, 고객은 게임을 그만하는 것(일명 접는 것)에 대한 부담이 거의 없다. 리니지나 메이플스토리 같은 RPG게임류는 게임 그 자체가 일종의 재화(재산)의 성격을 띄는 경우도 있어서 내가 애써 키워온 캐릭터를 쉽게 포기하기 힘들다. 게임을 접는 결정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게임회사가 지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객의 생애가치(lifetime value)를 알아야 한다. 언제 고객이 게임을 그만둘지 예상하고 대응해야한다. 그리고 고객의 생애가치를 늘리도록 노력해야한다. 쉽게 접어버릴 수 있는 게임을 최대한 오래, 많이, 큰 판에서 즐길 수 있도록 고민하려면 고객의 생애주기가 어떠한지 고객의 여정과 함께 알고 있어야 대응할 수 있다.
어떻게 알고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무슨 계기로 상위 채널로 올라갔는지, 접속 빈도가 잦아지고 뜸해진 이유는 무엇인지, 휴면이거나 해지를 할 조짐은 없는지, 생애주기 관점에서 살펴봐야 하겠으나 사실 게임회사 입장에서는 별다른 단서가 없다. 그냥 갑자기 어느 날부터 안 들어오는 유저를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
답은 고스톱 머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