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골픔제와 생애가치
신라에는 골품제(骨品制)라는 독특한 신분제도가 있었다. 성스러운 뼈라는 뜻의 성골, 진짜 뼈라는 뜻의 진골, 그리고 6두품부터 1두품까지. 이 제도가 독특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신분제였다는 것만이 아니다. 태어날 때 정해진 이 신분은 평생 바뀌지 않았고, 더 중요한 것은 오를 수 있는 관직의 상한선을 명확히 정해놨다는 점이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아무리 공을 세워도, 혈통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왕위는 물론이고, 고위 관직, 심지어 입을 수 있는 옷의 색깔, 탈 수 있는 수레의 종류까지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사회 전체를 혈통이라는 하나의 원리로 완벽하게 고정시킨 시스템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골품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성골은 신라의 56명의 왕 중 정확히 중간인 28대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대가 끊겨 사라졌다. 이후 왕위는 진골 출신만이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6두품은 진골층에서 분화되어 새롭게 등장한 계층이었다. 이들은 진골은 아니지만 귀족으로 인정받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한편 1~3두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간의 차이가 없어져 사실상 평민으로 간주되었다고 추정된다.
문제는 6두품이었다. 이들은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뛰어나도 6등급인 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그 위의 5등급 대아찬, 4등급 파진찬, 최고위 관등인 이벌찬, 각간 등은 오직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아예 제도적으로 막혀 있었다.
6두품의 한계를 가장 잘 말해주는 인물은 최치원이다. 그는 12살의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엄한 당부를 받고 떠난 길이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8세에 당나라의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했다. 외국인으로서 당나라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후 그는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황소의 난이라는 대혼란 속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그가 쓴 격문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황소의 반란군을 질타하며 천하에 의로움을 외쳤다. 문장이 너무나 뛰어나 황소가 이 글을 읽고 "이런 인재를 등용하지 못한 당나라 조정이 잘못이다"라고 탄식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최치원의 이름은 당나라 전역에 퍼졌고, 당나라 황제도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이후 그는 신라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가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그는 태어났을 때도 신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6두품이었다. 당나라에서 아무리 화려한 경력을 쌓았어도, 천하에 이름을 떨쳤어도, 신라의 골품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진골 귀족들이 독점한 고위 관직에는 오를 수 없었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담은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신라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의 무능함과 진골들의 기득권에 막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지방관으로 떠돌다가, 세상을 등지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은둔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의 좌절은 골품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초기 조건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 이후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시스템. 능력이 아니라 혈통이 지배하는 사회. 6두품, 5두품의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그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반대로 진골 귀족들은 혈통만 믿고 안일해졌다. 능력이 부족해도 고위 관직을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골품제의 폐단은 결국 진골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6두품 출신 지식인들은 신라를 떠나 새로운 세력에 합류했다. 후삼국 시대가 열리고, 견훤과 궁예가 각자의 나라를 세울 때, 이들 6두품 인재들은 새로운 주군을 찾았다. 최치원의 제자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6두품들이 새로운 시대의 설계자가 되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도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신라는 이 경직된 시스템 때문에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품제는 초기에는 질서를 유지하는 장치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막는 족쇄가 되었다. 인재를 썩게 만들고, 사회를 정체시키고, 종국에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제도. 그것이 골품제가 역사에 남긴 교훈이다.
태어날 때부터 오를 수 있는 관직의 한계가 명확했던 신라의 6두품처럼, 마케팅 캠페인을 통해 유입된 고객 역시 그들이 가진 초기 조건과 유입 경로에 따라 기업에 가져다줄 수 있는 기대 수익, 즉 생애가치의 한계선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다. 이 잔인하지만 명확한 초기 조건의 법칙을 우리는 실무 현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용해야 할까. 생애가치(lifetime value)란 고객 1명을 유입 시켰을 때 해당 고객이 낼 것으로 예상하는 매출을 의미한다. 이것을 알아야 마케팅 캠페인의 실행을 위한 투입(투자)의 규모를 결정할 수 있다.
사실 유저가 게임을 그만하는(접는) 이유와 방법은 너무 다양해서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부분의 유저는 "그냥" 그만두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안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천천히 시간을 줄이는 경우도 있다. 친구가 안 한다고 해서 함께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 다른 게임이 더 재밌어서 그걸 하느라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질려서 안하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나마 고스톱과 포커는 최소한 같은 장르 내에서는 게임성이 같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한OO에서 피O으로, 넷OO에서 한OO으로와 같은 경쟁사 간의 이동은 많지 않다. 그래서 처음 어디서 정착했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고 여기서 1차로 성패가 갈린다. 처음 게임을 시작한 유저들을 어떻게 사로잡고, 또 어떻게 상위 채널로 올리는지(유료 결제를 하게 만드는지)가 게임의 성공을 판단하는 전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다시 앞에서 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유저를 유입시키는 활동이야 다양한 홍보/마케팅(광고, 이벤트 등)을 통해 하면 되겠지만, 유저들이 게임을 어떻게, 얼마나 하는지(생애가치)를 알아내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답은 유저들이 만들어낸 데이터에 있다.
1판만 하고 재미없다고 그만두는 사람도 있고, 몇 판 해보더니 너무 재미있다고 결제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몇 년 동안 한 번도 결제는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소액이지만 꾸준히 결제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PC방에 갔을 때만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고, 비가 오는 날(집에 있을 때만)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다. 유저들이 게임을 할 때마다 수많은 데이터들이 쌓인다. 접속 시간, 게임 시간, 접속 채널과 같은 기본적인 데이터부터 어떤 패를 받고, 어떤 패를 냈는지, 또 얼마나 고민하고 패를 내는지, 보너스 패는 어떤 타이밍에 던지고 Go를 자주 부르는지 그냥 멈추는 성향인지 등등 모든 것들이 데이터로 남고 그것은 생애주기를 예측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다양한 수단과 데이터들은 결과적으로 게임머니(고스톱머니)의 유통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게임머니의 유통 규모와 딜러비의 회수 규모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모델링 끝에 생애가치(lifetime value)를 판별하는 공식을 만들어낸다.
공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2주간의 유통량) × (상관계수) × (고스톱머니 1억 원당 판매가)
결론적으로, 최초 유입 후 고객이 2주 동안 어떤 규모의 게임머니를 만들어냈는지 판단하여 해당 고객이 2년 동안 얼마의 매출을 낼지 예상할 수 있다. 이 공식은 매년 상관계수 조정과 게임머니의 현재가치를 반영하여 조정되지만, 기본적으로 꽤 잘 짜여진 예측 모델로 활용했었다.
여기서 시사하는 바는 3가지이다. 첫 번째는 2주간 유료 결제를 하지 않으면(유통량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결제를 하게 만들기 매우 어렵다. 두 번째는 마케팅의 성과(ROI)는 2주 내로 결정된다. 세 번째는 2년 후에는 대부분 이탈한다.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b²-4ac. 주입식 교육 덕분에 수십 년이 지나도 머릿속에 박히는 근의 공식 판별식이다. 우리는 마치 판별식처럼 이 생애가치 공식을 외우고 일을 했었다. 그것은 피O 맞고가 경쟁사보다 조금 더 기민하게 유저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해준 중요한 수학적 근거이기도 했다.
천년 전 신라의 골품제처럼, 2주라는 짧은 시간이 2년의 운명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