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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 게임의 경제학_마지막

인터넷 고스톱은 도박인가요?

by 초월김

https://brunch.co.kr/@bicco/15


"인정(人情)"

사람의 정으로 해석되는 이 단어는 지금은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원래 방납인들이 백성들에게 요구하던 뇌물을 의미했다.


조선 시대에는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 제도가 있었다.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관청에 바치는 이 제도는 원래 합리적인 조세 체계로 설계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중간에서 상인들이 관청과 짜고 물건을 대신 바친 뒤 백성들에게 몇 배의 값을 뜯어내는 '방납'이 성행했다. 이들 방납인들은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기생하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

정식 공납 외에 추가로 뜯어내던 이 "인정"은 수수료 겸 뇌물의 성격을 띠었고,

"우리나라는 인정의 나라", "진상은 한 꼬지인데, 인정은 한 바리"라는 속담까지 생길 정도로 만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는 '부당하게 요구하는 것'에서 점차 '사람 사이의 정', 그리고 현대에는 '인정하다'라는 의미로 변화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 속에 부당한 착취의 역사가 남아있는 셈이다.


방납의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단순한 중간상인이 아니라 일종의 경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청의 담당 관리들과 결탁하여 어떤 물품을 얼마에 받을지 미리 정해놓고, 백성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요구했다.

심지어 그 지역에서 나지도 않는 특산물을 바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백성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에 물건을 사서 바쳐야 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거나 유랑민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김육은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공물을 쌀로 통일하는 대동법의 확대를 적극 추진한 개혁가이다.

대동법은 광해군 시절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서 한정적으로 시행 되고 있었지만,

확대를 하기에는 기득권과 중간 상인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방납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던 상인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던 관리들도 극렬히 반대했다. "나라의 제도를 바꾸면 혼란이 온다", "지역 특산물 산업이 붕괴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김육은 단호했다.

단기적으로는 관리들의 수입이 줄고 반발이 심했지만,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방납인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백성들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는 기틀이 되었다.

방납인들을 척결하고 시스템을 정상화한 것이다.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결단이 장기적으로는 전체 시스템을 살렸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인터넷 게임 업계에서 비슷한 상황을 보았다.

"인터넷 고스톱, 포커는 도박인가요?"라는 질문에 한때 업계 종사자로서 답을 한다면, "네니오??" 정도 될 것 같다.

먼저 도박의 사전적 의미는 "2인 이상의 자가 서로 간에 재물을 걸고 우연에 의하여 재물의 득실을 결정하는 것"(대법원 2013년 판례, 나무위키 발췌)이라고 한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총 3개인데, 첫째는 2인 이상, 둘째는 재물, 셋째는 우연이다.

혼자서는 게임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니(인터넷 고스톱도 반대편에 "상대방"이 있다) 2인 이상일 것이고,

재물이 오고가지 않으면 도박은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해석이 애매한 키워드는 바로 "우연"이다.

대법원에서는 "우연"에 대해서도 다시 설명해 주었다.

우연이란 "주관적으로 '당사자에 있어서 확실히 예견 또는 자유로이 지배할 수 없는 사실에 관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것'을 말하고, 객관적으로 불확실할 것을 요구하지 아니한다"고 한다.

즉, 당사자의 능력이 승패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다소라도 우연성의 사정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되는 때에는 도박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인터넷 고스톱과 포커는 도박이 맞다.

2인 이상인가? 네. 우연에 의하여인가? 네. 재물의 득실이 결정되는가? 네.

여기서 질문이 또 하나 생긴다.

"인터넷 고스톱머니가 재물인가요?"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앞서 인터넷 고스톱이 도박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인터넷 고스톱과 포커는 도박이 아니다.

2012년 이후로 인터넷 고스톱과 포커에서의 게임머니를 현금으로 환전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게임머니가 재물이 될 수 없다.

고스톱머니나 포커머니를 재물로 만들 수 있는 방법(현금화할 수 있는 방법)은 최소한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없다.

"게임회사에서 판매하는 고스톱머니를 '환불'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 역시도 불가능하다.

게임회사는 앞서 다른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게임머니를 직접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아바타"나 "아이템"을 판매하면서 게임머니는 서비스로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환불 자체가 불가능함을 명시하고 있다.

만약 환불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게임머니만 환불을 받아주는 곳은 없다.

다만 사행성이 있긴 하기에 게임물등급위원회에서 19세 이상 성인만 할 수 있도록 등급을 부여하였을 뿐이다.


문제는 사람 간의 일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해외에 서버를 둔 불법 고스톱/포커 게임 사이트는 당장 구글링만 해봐도 수천 개는 될 것이다.

이들 사이트에서는 게임머니를 쉽게 사고팔고 현금화할 수 있거나, 운영자 자체가 사기꾼이어서 게임머니를 환전해 준다고 현금을 받아간 뒤 잠적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당연히 게임 자체가 조작(즉, 우연이 아니라는 뜻)인지도 알 수 없다.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등급을 받은 인터넷 고스톱과 포커류 게임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게임머니를 거래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용자들 간에 암암리에 거래하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

게임머니를 일부러 잃어주는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게임머니를 넘겨주는 것까지 통제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이 경우 인터넷 고스톱은 도박으로 볼 수 있다.

즉, 도박인지 아닌지는 서비스 주체의 서비스 방식뿐만 아니라 이용자가 이를 "재물화"할 수 있는지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정된다.


고스톱머니/포커머니의 환전 행위가 완전히 금지된 것이 2012년 경이라, 내가 근무했던 2000년대 후반에는 등급을 받은 고스톱 게임의 고스톱머니도 일부 사이트에서 거래가 가능하였다.

즉, 게이머 입장에서는 현금화하고 심지어 수익을 거둘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게임회사의 입장에서는 사실 이를 알면서도 제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요즘은 전 여친, 남친을 "X"라고 부르곤 하는데(환승연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널리 알려진), 우리 게임회사에서는 게임머니의 현금 거래(일부러 잃어주는 행위)를 주로 하는 사람들을 X라고 칭하곤 했었다.

나름의 자정 노력으로 이상 행위를 하는 유저들을 제재하곤 했지만, 어쨌든 그들도 회사의 고객이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

일단 일부러 잃어줬다는 증거를 잡기가 굉장히 애매하고, 그조차도 실수였다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또 아는 사람들끼리 같은 방에서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랜덤 입장을 시킨다든지 하는 식으로 밀어주기를 못하게 하더라도, 사람이 매우 적은 새벽 시간대에 빈 채널을 이용한다든지 하면 막을 방법은 없다.


고스톱과 포커가 일종의 경제 시스템 안에서 돌아가는 가운데 고스톱머니를 현금화 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파생되는 직업도 생긴다.

백화점 상품권이 백화점 밖의 상품권샵에서 거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스톱머니도 대량으로 유통하는 "X"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의 존재는 게임회사 입장에서는 솔직히 계륵과도 같았다.

게임머니의 유통을 활성화시키고 게임머니의 가치를 올려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게임회사 입장에서도 게임머니의 유통이 활성화되면 좋은 것이었기에, 방치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종의 지하경제(?)인 만큼 얼마만큼의 게임머니가 유통되는지 알 수 없고,

이로 인해 게임의 본질이 오락에서 도박으로 변하면서 대부분의 선량한 유저들을 오히려 게임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또 공식적인 게임머니를 구매하지 않고 외부의 사이트에서 거래하게 되면 게임머니의 가치가 하락하고 게임회사의 매출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이에 2008년 경부터는 매출 하락을 감수하고 본격적으로 "X"에 대한 게임회사 차원의 제재가 시작되었다.

먼저 한 달에 충전할 수 있는 게임머니의 한도를 30만 원으로 제한하였다.

게임머니의 공급 자체를 제한하여 가치 하락을 막고자 한 것이다.

또 아이디 실명제와 보안 인증을 강화하여 여러 아이디를 돌려쓰거나 게임머니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게임머니의 이동을 자동/수동으로 감지하고 영구 정지와 같은 패널티도 강하게 부여하였다.


피망 고스톱과 포커는 당시에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X"를 양성하고 게임머니를 현금화하는 것을 부추김으로써 매출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만약 그 길을 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단기적으로는 큰 돈을 벌었겠지만, 결국 인터넷 도박 사이트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경영진의 입장에서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게임처럼 하루하루 즉시 매출이 보이는 환경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딜러비 0.1%만 조정해도 매출이 변하는 것이 바로 보이는데, 유통량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업자("X")들을 과감하게 쳐내는 결단을 한 것이다.

나는 이 결정이 2025년인 지금까지 피망 고스톱과 포커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도박장이 되느냐, 국민 고스톱이 되느냐는 순간의 판단이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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