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제병오신척이 아닌 제너럴셔먼호의 디테일

마케팅의 본질이 되다

by 초월김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사소한 장면이 행동의 계기가 된다.

퇴근길 우연히 만난 저녁 노을을 보다가 문득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지인에게 안부를 묻는 것처럼. 책장을 정리하다 먼지 쌓인 옛 일기장을 발견하고는 그날 저녁 내내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삶의 중요한 전환점은 의외로 이런 작은 순간에서 시작된다. 한국사에 대한 내 관심도 그랬다. 우연하게, 그냥 문득.

2024년 11월, 우연히 대전을 여행하던 날이었다. 성심당 근처 프렐류드라는 문구점 앞 골목에서 한 택시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랩핑이 특이한 택시인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뭔가 특별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사 능력검정 1급 인증서와 100점 만점 성적표가 붙어 있는 택시. '국가공인시험 전국 1등'이라는 문구도 함께 붙어 있었다. 바로 이동희 님이 모는 일명 '한국사 만점 택시'였다. 대전의 수많은 택시 중에 하필 그 골목에서, 그 시간에 이 택시를 만나다니. 처음에는 신기했고, 나중에는 궁금해졌다. '한국사 능력검정 시험이란 어떤 시험일까? 어떤 시험이길래 이렇게 자랑스럽게 택시 외관을 장식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기사님은 왜 이 시험을 준비했고, 만점을 받은 것에 왜 그토록 자부심을 느끼는 걸까?'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택시가 계속 생각났다. 며칠 뒤, 나는 한국사능력검정 시험에 대해 알아보고 곧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직장생활에 조금은 지쳐 있었던 내게, 회사의 업무와 관계없는 공부(최소한 시험 공부를 시작할 땐 그런 마음이었다.)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보려는 목적으로 시작했다. 어쩌면 새로운 영역으로의 도전이었다.


역사는 곧 이야기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던 옛날이야기처럼,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이 남긴 유물과 이야기가 역사가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할머니의 보릿고개 이야기, 할아버지의 일제강점기 기억들.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우리의 현재와 맞닿아 있는 살아있는 경험이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던가? 정말 재밌게 이야기처럼 설명해 주시던 선생님도 있었고, 연도와 사건을 중심으로 주입식으로 말씀해 주시던 선생님도 있었다. 분명한 건 역사를 단편적인 사실을 외우는 암기 과목으로 접근하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병인박해 - 제너럴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신미양요 - 척화비'를 앞 글자만 따서 '병제병오신척'으로 외우는 방식. 단기 시험 점수를 위해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잊힌다. 물론 이 책의 독자들은 병제병오신척을 잊을 일을 없을 것이다. 암기가 아니라 이야기로 풀어낼 예정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정한 재미는 그 이면에 있다. 각각의 사건이 왜 일어났고, 그다음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는 없는지 파고들다 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사건이 연결되면서 전체 그림이 드러나는 순간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시, 제목에서 언급한 '제너럴셔먼호 사건'만 해도 그렇다. 교과서에는 신미양요의 원인으로 짧게 언급된다. 미국 상선이 통상을 요구했는데 평양 시민들이 이를 거부하고 배를 불태워버린 사건. 대부분은 여기까지만 알고 있다. 심지어 '조선이 쇄국정책을 고수하다가 서양과 충돌했구나' 정도로만 이해한다.


역사를 이해할 때 중요한 건 맥락이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단순한 사실 나열과는 차원이 다르다. 먼저 제너럴셔먼호는 민간 상선이었다. 미국 국적이긴 했지만, 통상 수교 요구는 국가 차원이 아니었다. 선주와 선원들의 독단이었다. 일종의 상인이자 모험가들. 당시 동양과의 무역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서양에 퍼져 있었고, 이들은 그 기회를 잡으려 조선까지 왔다. 처음에 평양 시민들은 제너럴셔먼호를 신기해했다. 서양의 큰 증기선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아이들은 강가에 모여 커다란 배를 구경했고, 어른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식량이 떨어졌다고 하자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는 조선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낯선 이방인이지만, 어려움에 처했다니 도와주자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양이(서양인)에 대한 정책은 '유원지의(柔遠之義)'였다. 멀리서 온 사람들에게 의리를 지킨다는 뜻. 굳이 분란을 만들지 않겠다는 태도.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 철학이었다. 상대가 먼저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우리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약탈을 자행했다. 강변의 마을에서 식량을 빼앗고, 주민들을 위협했다. 선의로 다가온 조선인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물자를 빼앗아갔다.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심지어 이때까지만 해도 제너럴셔먼호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내 설득하기도 했다. 박규수는 개화파 인사로, 서양 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이현익을 보낸 것은 일종의 최후통첩이자 동시에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되려 이현익을 잡아 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민간이 공무원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외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더욱이 무력을 사용하여 관리를 납치했다는 것은 명백한 전쟁 행위나 다름없었다.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처음에는 신기해하고 도와주기까지 했던 평양 시민들이었지만 제너럴셔먼호의 행동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우리가 선의로 대했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분노가 평양 전역에 퍼졌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자 제너럴셔먼호는 도망치려 했다. 인질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졌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어쩌면 천운이었다. 수위가 높았다면 제너럴셔먼호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고, 역사는 또 다르게 전개됐을 지도 모른다.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짚을 가득 실은 목선들을 보내 불을 질렀고,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제너럴셔먼호 소각 사건의 전말이다. 몇몇이 가까스로 탈출했고, 온건 개화파였던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기보다 협상에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박규수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살려두면 추후 미국과의 외교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불필요한 살상을 피하고자 하는 유교적 이념도 작용했지 모른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고, 탈출한 이들은 시민들에게 맞아 죽고 만다. 약탈과 납치를 당한 평양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그냥 보내줄 수 없었다. 민중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간 상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기에 미국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신미양요가 벌어지기까지는 무려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게 된다. 5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즉각적으로 미국의 보복이 이루어졌다면 또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책임은 국경을 침범하고 조선의 요구를 무시하며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 민간인을 살상하고 군인을 납치하기까지 한 제너럴셔먼호에 있다. 신미양요까지 5년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 제너럴셔먼호가 민간 상선이었으며 충분히 살아남을 기회가 많았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 하나하나에는 우리가 모르는 맥락과 디테일이 숨어 있다. 단순히 '조선이 쇄국정책 때문에 서양 배를 불태웠다'고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절반만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은 대부분 인과관계와 그 시대의 맥락 속에 있다. 예측 없이 또는 우연히 발생하는 교통사고 같은 사건들이 아니다.


나는 '맥락(Context)'이야말로 마케팅과 역사, 특히 한국사를 관통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 시대적 배경과 사건의 맥락을 알아가다 보면 통찰로 이어진다.

어떤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보인다. 역사 공부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비즈니스와 마케팅도 똑같다. 마케팅의 통제 변수 4P(Product, Price, Place, Promotion)에 3P를 더하면 7P가 된다. 물리적 증거(Physical Evidence), 사람(People), 과정(Process). 4P를 보강하는 마지막 3P는 '맥락' 한 단어로 귀결된다.

고객이 우리 제품을 어떤 상황에서 만나는가?

어떤 물리적 환경에서 경험하는가?

어떤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가?

구매까지의 과정은 어떠한가? 이 모든 것이 바로 맥락이다.

맥락에 대한 통찰은 고객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이어진다. 고객을 잘 알고, 고객이 우리 제품을 인지하고 구매하기까지의 상황을 잘 안다면? 마케터는 적재적소에 맞춤형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같은 커피 한 잔도 맥락에 따라 다르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 앞 커피. 오후 카페에서 친구와 마시는 커피. 야근하며 마시는 커피. 완전히 다른 의미다. 일 잘하는 마케터는 이 차이를 이해하고, 각 상황에 맞는 메시지와 경험을 설계한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맥락을 읽는 훈련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재의 상황도 맥락 속에서 파악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같은 질문을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문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가 남긴 기록에서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후대 사람들이 신채호 선생의 정신을 기리며 만든 말로 추정된다. 그러나 출처가 어디든, 이 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역사를 잊지 않고 배우며 되돌아봄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데 지혜를 얻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자 결론이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최고의 도구다. 마케터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과서는 없다.


한 가지 이야기에 더 들어가보자.

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은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 특히 청나라의 힘을 자주 빌렸다. 당시로서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조선 단독으로는 내부 반란과 혼란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고, 가장 친하고 믿을 만한 강대국은 청나라뿐이었다.


1882년, 구식 군대가 차별에 반발해 일으킨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 당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급료를 제때 받고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구식 군대는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못했고 심지어 받은 급료마저 모래가 섞인 쌀로 지급되었다.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고종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청군 3천여 명이 조선에 들어와 반란을 진압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대가로 청나라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기 시작했다.

1884년 청나라의 내정 간섭에 반발한 개화파의 갑신정변 역시 청나라의 도움으로 진압했다.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낙성식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3일 천하를 꿈꿨지만, 고종이 다시 청군을 불러들이면서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창덕궁에서는 청군과 일본군 간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청·일 양국은 '텐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양국이 조선에 파병할 때 서로 알리도록 규정했는데, 사실상 '자동 참전' 조항과 다름없었다. 한 나라가 군대를 보내면 다른 나라도 자동으로 군대를 보낼 수 있는 조약.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텐진 조약은 무려 10년이 지나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동된다.


10년 뒤인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다시 청군을 불러들였다. 이쯤 되면 사실 너무하다 싶기는 하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장악했고, 조선 정부의 힘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해 보였다. 고종은 또다시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10년전 맺은 텐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 역시 조선에 들어왔다.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군대를 파견했고, 어느새 조선 땅에는 청군과 일본군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조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선은 전쟁터가 되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본격적인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청나라를 물리친 일본은 이제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이겼다면 괜찮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궁금증을 갖는다. 만약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승리했다면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if)'은 없다. 가정이 붙는 순간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 된다. 역사학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루는 학문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을 상상하는 것은 흥미로운 사고의 영역일 수는 있지만, 역사학의 영역은 아니다. 심지어 청나라가 승리했더라도 밀려드는 외세의 간섭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서양 열강과 일본은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청나라가 이겼다 해도 일본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열강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럼 고종은 그저 어리석어서 청군을 불러들였던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내란을 진압하려면 군대가 필요했고, 당장 손을 내밀 수 있는 상대가 청나라뿐이었다. 조선의 군사력만으로는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반란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고종이 단기적인 문제 해결에만 집중했다는 부분이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것, 갑신정변을 막는 것, 동학 농민 운동을 제압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당장의 위기였고, 고종은 그 위기를 넘기는 데만 급급했다. 장기적으로 외세 개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못했거나, 고민했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고종은 역사 공부를 깊이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은 오랫동안 명나라,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를 유지해왔다. 물론 때때로 전쟁이 있었지만(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그것은 외세가 직접 쳐들어온 침략 전쟁이었지, 조선이 자발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여 내부 문제를 해결한 경우는 드물었다. 분명한 사실은 외세의 개입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 대가는 경제적·사회적 부담이라는 이름의 '청구서'로 돌아오게 된다. 청군이 임오군란을 진압한 대가로 조선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청나라의 내정 간섭은 갈수록 심해졌다. 조선의 자주성은 점점 약해졌다. 만약 유사한 역사가 있었다면, 고종 역시 청나라에 손을 내미는 결정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소한 한번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했을 것이다.

"이전에 외세를 끌어들였던 나라가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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