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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가 한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병제병오신척 말고 평양에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

by 초월김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사소한 장면이 어떠한 행동의 계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퇴근길 우연히 만난 저녁 노을을 보다가 문득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지인에게 안부를 물어보는 것 같은 일들 말이다.

한국사에 대한 내 관심도 그렇게 우연하게, 그냥 문득 시작되었다.

2024년 11월, 우연히 대전을 여행하던 날이었다.

성심당 근처 중앙동에서 한 택시를 만났다.

한국사 능력검정 1급 인증서와 100점 만점 성적표가 붙어 있는 택시. ‘국가공인시험 전국 1등’이라는 문구도 함께 붙어 있었다.

바로 이동희 님이 모는 일명 ‘한국사 만점 택시’였다.

대전의 수많은 택시 중에 하필 그 골목에서 이 택시를 만나다니.

그저 처음엔 신기했고 나중엔 궁금해졌다.

한국사 능력검정 시험이란 어떤 시험일까?

어떤 시험이길래 이렇게 자랑스럽게 택시 외관을 장식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역사는 곧 이야기이기에 다른 과목에 비해 공부하는 재미는 있는 편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 주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과거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남긴 유물과 이야기는 역사가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역사를 단편적인 사실만을 외우는 암기 과목으로 접근하면 그 양이 너무 방대하기에 당연히 재미가 없다.

예를 들어, 구한말의 주요 사건인 '병인박해 - 제너럴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신미양요 - 척화비'를 순서대로 ‘병제병오신척’ 같은 식으로 외우라고 가르치는 강사들이 많다.

단기에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도 때론 필요하겠지만, 결정적으로 이렇게 하면 재미는 별로 없다.

그런데 각각의 사건이 왜 일어났고, 그다음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는 없는지 알아보다 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너럴셔먼호 사건만 해도 그렇다.

교과서에는 신미양요의 원인으로 짧게 언급된다.

미국 상선이 대동강에서 통상 수교를 요구했는데 평양 시민들이 이를 거부하고 배를 불태워버린 사건, 그리고 이를 알게 된 미국이 신미년에 이를 빌미로 쳐들어온 것이 신미양요라고 말이다.

물론 전체적인 사실관계는 맞지만, 그 뒷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먼저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먼저 제너럴셔먼호는 민간 상선이었다.

미국 국적의 배이기는 하나 통상 수교 요구가 국가 차원의 요청이 아닌 제너럴셔먼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처음에 평양 시민들은 제너럴셔먼호를 신기해했고, 식량이 떨어졌다고 하자 먹을 것과 자재들을 나눠주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양이(서양인)에 대한 정책은 ‘유원지의(柔遠之義)’였다.

멀리서 온 사람들에게 의리를 지킨다는 뜻이다. 굳이 분란을 만들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약탈을 자행했다.

심지어 이때까지만 해도 제너럴셔먼호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그들은 되려 이현익을 잡아 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이에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셔먼호는 도망치려 했지만, 인질을 억류하고 풀어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짚을 가득 실은 목선들을 보내 불을 질렀고,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이 와중에 몇몇이 가까스로 탈출했고, 온건 개화파였던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기보다 협상에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탈출한 이들은 시민들에게 맞아 죽고 만다.

민간 상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기에 미국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신미양요가 벌어지기까지는 무려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책임은 국경을 침범하고 조선의 요구를 무시하며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 민간인을 살상하고 군인을 납치하기까지 한 제너럴셔먼호에 있다.

신미양요까지 5년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제너럴셔먼호가 민간 상선이었으며 충분히 살아남을 기회가 많았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은 대부분 인과관계와 그 시대의 맥락 속에 있다.

예측 없이 또는 우연히 발생하는 교통사고 같은 사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맥락(Context)’이야말로 마케팅과 역사, 특히 한국사를 관통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사건, 사람, 시대적 배경의 맥락을 알아가다 보면 결국 어떤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참고할 수 있는 통찰로 이어진다.

마케팅의 통제 변수인 4P(Product, Price, Place, Promotion)에 3P를 더하여 7P를 구성하는 것은 물리적 증거(Physical Evidence), 사람(People), 과정(Process)이다.

이 마지막 3P는 결국 ‘맥락’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될 수 있다.

맥락에 대한 통찰은 고객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이어진다.

고객을 잘 알고, 고객이 우리 제품을 인지하고 구매하기까지의 상황을 잘 안다면 마케터는 그야말로 적재적소에 맞춤형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은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 특히 청나라의 힘을 자주 빌렸다.

1882년, 구식 군대가 차별에 반발해 일으킨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1884년 청나라의 내정 간섭에 반발한 개화파의 갑신정변 역시 청나라의 도움으로 진압했다.

이때 창덕궁에서는 청군과 일본군 간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청·일 양국은 ‘텐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양국이 조선에 파병할 때 서로 알리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사실상 ‘자동 참전’ 조항과 다름없었다.

10년 뒤인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다시 청군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텐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 역시 조선에 들어왔고, 결국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본격적인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이겼다면 괜찮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if)’은 없다.

가정이 붙는 순간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 된다.

게다가 설사 청나라가 승리했더라도 밀려드는 외세의 간섭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렇다면 고종은 단순히 어리석어서 청군을 불러들였던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란을 진압하려면 군대가 필요했고, 당장 손을 내밀 수 있는 상대가 청나라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역사 공부를 깊이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당시 조선 역사 속에는 ‘외세 개입’이라는 전례가 뚜렷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외세의 개입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 대가는 경제적·사회적 부담이라는 이름의 ‘영수증’으로 돌아오게 된다.

만약 유사한 역사가 있었다면, 고종 역시 청나라에 손을 내미는 결정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문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가 남긴 기록에서 직접적인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역사를 잊지 않고 배우며 되돌아봄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데 지혜를 얻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곧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중요한 ‘참고서’다.

마케터는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의 결정과 어떤 사건이 일어난 전후 맥락을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케터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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