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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힘이 되는 마케팅_마지막

진심을 전하는 한 끗

by 초월김

https://brunch.co.kr/@bicco/25


제주도에서 가파도와 마라도로 가는 여객선을 탈 수 있는 서귀포의 모슬포 근처를 지나다보면 추사 김정희 유배지 유적이 있다.

김정희는 이 곳에서 9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고 한다.


유배 5년차에 접어든 1844년, 김정희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상함만을 느끼던 김정희에게 이상적이라는 제자가 북경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 스승에게 보냈다.

당시 중국 서적은 조선에서 구하기 어려운 보물이었고,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자신의 사비를 들여 스승이 원하는 책을 구해 제주도까지 보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서였다.


크게 감동한 김정희는 제자에게 <세한도>를 그려 선물한다.

69.2cm × 23cm 크기의 이 수묵화는 소나무 한 그루, 잣나무 세 그루, 집 한 채가 전부인 극도로 간결한 그림이다.

그림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디테일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김정희는 그림 오른쪽 하단에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거창한 글귀나 화려한 그림 대신, 작은 인장 하나.

하지만 그 장무상망, 단 네 글자 속에는 "권세가 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힘들 때 나를 기억해준 그대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라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더 놀라운 것은 이후의 이야기다.

이상적은 이듬해 북경으로 갈 때 이 그림을 가져가 청나라 문인 16명에게 보였고, 그들은 감동받아 찬시를 남겼다. 10m 이상의 화폭 대부분은 그림에 대한 절절한 찬사를 담은 당대 청나라 문인 16명과 20세기 국내 전문가 4명의 감상글로 채워져 있다.

원래 23cm 높이의 그림이 현재는 14m가 넘는 두루마리가 된 이유다.

한 번의 세심한 배려가 시대를 초월한 감동의 연쇄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김정희는 제자 마음속 '그리움'이라는 pain point를 정확히 어루만졌다.

단순히 그림을 그려준 것이 아니라, 제자의 입장에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썼다고?"라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낸 것이다.

유배지에서 그린 간결한 그림 한 장.

그 구석에 찍힌 작은 인장 하나.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1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이것이 바로 마이크로 밸류의 본질이다.

거창한 보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한 끗의 배려.

그것이 브랜드의, 아니 인간관계의 '진가'가 되는 것이다.


Micro Value는 넓은 의미로는 넛지의 한 갈래로 볼 수도 있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넛지는 소비자의 행동 변화를 비교적 직접적으로 유도하는 반면, 마이크로 밸류는 고객이 쉽게 인식하기 힘든 미세한 디테일에 가치를 부여하여 감동을 제공하는 쪽에 가깝다.

거창한 메시지나 대대적인 물량 공세 대신 세밀하고 작은 지점을 공략한다는 측면에서는 닮아있고, 인간의 심리를 자극하여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한다는 측면에서도 비슷하다.

넛지는 비교적 잘 알려진 개념이고, 마케팅 캠페인 기획이나 UX 기획에서 정형화된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마이크로 밸류는 정형화하기 어렵고 제품의 완성도나 디테일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제품이나 고객 경험의 완성도 측면에서 마이크로 밸류에 대한 검토는 필수라기보다는 선택사항에 가깝다.

제품이 좋으면 잘 팔린다는 것은 상식과도 같은 이야기이지만, 거기에 완성도와 디테일이 더해진다면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브랜드의 와이셔츠는 배꼽 쪽 두 개 단추의 간격을 조금 더 촘촘하게 달아놓았다.

이는 배가 불룩 튀어나왔을 때 옷맵시가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와이셔츠를 사겠다고 결정한 고객의 고려사항에서 배 부분의 단추 간격은 리스트에 없을 가능성이 높다.

가격이나 색깔, 브랜드, 소재 같은 기본 요소들이 구매를 위한 고려사항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배 부분의 단추 간격 조정과 같은 디테일은 그 브랜드를 경험한 고객에게 은근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다음번에 와이셔츠를 살 때 분명한 참고요소가 된다.

즉, 마이크로 밸류는 매출 발생의 주된 메커니즘으로 검토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브랜드의 충성도와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이를 나는 "진가"라고 부르고 싶다.

기본적인 고객의 needs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넘어서 고객이 원하는, 또는 미처 기대하지 못한 세밀한 디테일까지 챙겨줄 때 고객은 그 브랜드에 더 감동하고 그야말로 찐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가들이 모이면, 가격이 조금 비싸 경쟁 제품과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진가가 살아있는 브랜드가 선택되도록 만드는 트리거가 될 수도 있다.

룰루레몬은 마이크로 밸류에 집중하여 프리미엄 브랜드로 거듭난 좋은 사례이다.

이제는 조금 비싸도 그냥 룰루레몬을 바로 구매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정도다.

운동 중 발생하는 사소한 불편함(예: 레깅스가 흘러내리는 문제, 봉제선이 쓸리는 문제)을 집요하게 해결했다. Nulu 원단과 같은 독자적인 소재를 개발하여 "입지 않은 것 같은 편안함"이라는 극도의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높은 가격대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엄한 브랜드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썼다고?"

어떤 제품을 만나든, 마이크로 밸류를 소비자가 직접 알아냈을 때의 감동은 회사가 의도한 그것 이상이다.

마이크로 밸류는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까?

출발은 pain point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객이 제품을 인지하고, 구매를 고려하고, 정보를 탐색하며, 실제 구매하는 모든 과정, 그리고 구매 이후에 벌어지는 사용의 경험 속에서 고객이 불편한 지점(pain point)은 분명히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pain point들을 단순히 고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pain point 자체를 감동과 만족의 경험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해보면 좋을지 고민할 때 micro value가 되고 브랜드의 "진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pain point를 "불만"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 또는 "거슬림"의 영역까지 확장해서 바라볼 때 micro value를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더 잘 보일 수 있다.

배 나온 사람들이 단추 간격을 조정해 달라고 옷 만드는 회사에 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옷이 일정한 간격으로 단추가 부착되어 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micro value를 더해가는 관점에서 pain point와 함께 살펴볼 부분은 고객이 제품을 사용하는 맥락(context)이다.

극장에서 스마트워치의 불빛은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워치를 끄지 않는다.

휴대폰처럼 지속적으로 들여다보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관 앱과 스마트워치의 연동으로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에만 극장 모드가 설정되도록 하면 어떨까.

이미 스마트워치에서는 원클릭으로 극장 모드, 비행기 모드 등을 설정할 수 있는 단축키를 제공하고 있다.

스마트워치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context)을 미리 고려한 것이다.


넛지를 micro value로 확장시켜 고객의 행동을 더 디테일하게 유발할 수도 있다.

일부 지하철에서는 임산부석을 핑크색으로 만드는 것(넛지)도 모자라 아예 인형을 하나 놔두었다.

그곳에 앉으려면 인형을 들고 앉아야 한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세심하게 맥락을 고려해서 micro value를 잘 적용한 사례 같지만, 이 사례가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결국 고객의 pain point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형 자체가 공용 공간에서 여러 명이 사용하기에 위생적이지 않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무엇보다 위생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임산부들에게는 여러 사람이 만진 인형이 불편함(pain point)으로 다가올 수 있다.


넛지는 고객을 우리 회사로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기법이라면, 마이크로 밸류는 경쟁사 대비 한 끗 차이의 감동을 주는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이크로 밸류를 잘하는 기업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성장해 나갈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고객의 입장에서 감동을 주는 사소한 지점. 마케터와 기획자는 그 부분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찾아내야 한다.

억지스럽지 않게 말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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