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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지어주세요_1

큰복을 누리리라, 경복(景福)

by 초월김

조선 건국 초기,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던 정도전에게 태조 이성계는 갓 완공된 새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

한양 북쪽, 북악산을 등지고 우뚝 선 이 궁궐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왕조의 정체성을 담을 그릇이자, 새 나라가 추구할 가치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정도전은 단순히 멋진 이름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궁궐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지 깊이 고민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올린 이름은 '경복(景福)'이었다.

"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既醉以酒 既飽이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토록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단어였다.

여기서 '경(景)'은 '크다'는 뜻이고, '복(福)'은 '복'이니, 글자 그대로 '큰 복'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의미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경복'이라는 네이밍에는 몇 가지 치밀한 전략이 담겨 있었다.

첫째, 새 나라와 백성이 큰 복을 누리길 바란다는 강력한 축복의 메시지였다.

고려 말의 혼란을 겪은 백성들에게 새 왕조가 번영과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둘째, 짧고 명료한 두 글자를 선택하되 유교 경전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왕과 신하들의 신뢰를 얻었다.

당시 유교 이념을 국가의 기반으로 삼으려던 정도전에게 <시경>의 인용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다.

셋째, 복잡한 수식어나 어려운 한자 없이 '큰 복'이라는 본질에 집중한 단순함이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정도전이 지은 이 이름은 6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조선의 으뜸 궁궐'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경희궁. 조선의 다섯 궁궐 중에서도 경복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단순히 규모가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큰 복'이라는 이름이 가진 긍정적 에너지와 상징성이 600년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껍데기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가치와 에너지를 채워 넣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설계의 과정이다.

정도전이 궁궐의 이름을 고민하던 것에는 비할바 아니지만, 나역시 입사 후 처음 받은임무가 바로 네이밍이었다.


게임회사에 입사하고 3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맡은 업무는 명확하지 않았고, 사실 엑셀도 제대로 못 해서 드래그만 해도 수식이 복사되어 펼쳐진다는 것에 신기해하던 수준이었다.

주로 하던 일은 전날 매출과 게임머니 유통을 모니터링하고, 만약 이상 징후가 있으면 보고하는 일이었다.

"숫자를 계속 봐야 한다"던 팀장님의 조언은 장기적으로 사업의 '감'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루해 보이던 일상적인 모니터링 업무가 나중에는 비즈니스 인사이트의 기초가 되어준 셈이다.

그러다 처음으로 메인을 맡은 프로젝트는 확률형 고스톱머니 지급 아이템의 리뉴얼이었다.

고정형 상품은 아바타를 구매하면 금액에 따라 일정한 고스톱머니가 지급되는 반면, 확률형 상품은 말 그대로 확률에 따라 랜덤하게 고스톱머니가 지급된다.

문제는 이 상품의 원래 이름이 "고스톱머니 복권"이었다는 점이다.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상품명을 변경할 것을 권고받았다.

그냥 상품명만 바꾸면 되는, 말 그대로 껍데기만 바꾸면 되는 쉬운 일이었기에 신입사원인 나에게 주어진 일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왕 이름을 바꾸는 김에, 이 상품이 잘 팔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함께 고민하기로 했다.

먼저 확률로 지급되는 최고 머니의 구간을 대폭 올렸다.

예를 들어 100원짜리 복권을 사면 최대 1천만 원의 고스톱머니가 지급되었다면, 거의 10배 수준으로 올린 것이다.

물론 그냥 올릴 수는 없었다. 게임머니가 출현하는 구간과 확률값을 조정하여 더 세분화해서 설계했다.

즉, 예전에는 게임머니 1천만 원이 1% 확률로 등장했다면, 이제는 1천만 원은 0.5% 확률로, 1억 원은 0.01% 확률로 등장하는 식으로 조정했다.

전체 기댓값은 유지하되 최대 당첨 금액을 크게 높여 임팩트를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상품 판매 페이지에 '어제의 1억 원 당첨자 아이디'를 노출하여 관심을 끌도록 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네이밍이었다.

확률에 따라 지급되는 '복권'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사행성을 조장하지 않고 임팩트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확률형 아이템이지만 고스톱머니는 아바타와 함께 판매해야 하는 만큼 아바타로도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처음 제안한 이름은 "폭탄100, 폭탄500, 폭탄1000"이다.

각각 100원, 500원, 1000원에 구매하면 확률에 따라 게임머니가 터지고, 아바타로 폭탄 이미지를 장착하도록 기획했다.

게임머니가 폭탄처럼 쏟아진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팀장님께 보고했고, 결과는 팀장 선에서 컷.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식상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탈락 이유는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재난, 전쟁, 범죄 등과 관련된 소재는 상품명으로 절대 쓰면 안 된다.

기본을 망각한 네이밍이었다.

야심 차게 제안한 네이밍이 기본적인 이유로 거부되고 반나절 정도 고민에 빠졌다.


사고의 흐름이 온통 '폭탄'에만 머물러 있었고, 다른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폭탄 이미지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바타 옆에 검은색 폭탄 이미지 하나 놓여 있어도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다.

내 의도는 게임머니가 '터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새롭게 제안한 네이밍은 "펑"이다.

"펑100, 펑500, 펑1000". "쾅"도 생각해봤지만, 쓰기 불편하고 너무 폭탄 터지는 소리를 그대로 재현한 것 같았다.

"펑"이라는 이름은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으로 터지는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었다.

게임머니가 터지는 이펙트와 함께 아바타로 판매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게 상품명은 '펑'으로 정해졌고, 기댓값을 조정한 새로운 고스톱머니 확률형 상품 "펑"은 출시 첫날 기존 대비 매출 8배를 달성했다.

소위 말해 대박이 난 것이다.

내가 이름을 제안하긴 했지만, 사실 내 역할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매출이 오른 이유는 아마도 신규 상품 효과와 함께 최고로 지급되는 고스톱머니의 구간을 넓힌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이름이 '펑'이든 '팡'이든 크게 상관없었을 거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좋은 이름'이라는 내부 평가와 함께 매출도 증가하며, 신입사원이었던 나에게 큰 성취감과 동기부여의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다음 프로젝트로 1,000원, 3,000원, 5,000원짜리 확률형 아이템의 리뉴얼 업무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단순히 이름만 바꾸는 것보다는 상품 자체에 상품성을 더 가미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펑'과 마찬가지로 확률형으로 게임머니를 지급해야 하지만, '복권'이라는 이름은 역시 쓸 수 없었다.

처음에는 과녁 돌리기 게임 같은 것을 생각했지만, 게임이 약간 단조롭고 이름을 뭘로 할지도 마땅치 않았다. 뽑기, 사다리타기, 구슬치기 같은 온갖 게임이 아이디어로 동원되었고, 최종 결정된 게임은 사다리타기였다.

애초에 구매하는 순간 확률값에 의해 지급되는 고스톱머니는 정해져 있었지만, 이펙트로 마치 사다리게임을 하는 것처럼 구현했다.

사다리 선택 칸을 7개 정도 만들고, 유저가 어떤 칸을 고르든 정해진 확률에 따라 아래쪽에 게임머니가 당첨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려면 굉장히 많은 사다리판을 사전에 준비해야 했고, 그 부분 개발과 디자인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그럼 이름은 뭐라고 지었을까?


네이밍을 할 때는 기본적으로 3S를 고려해야 한다.

짧고(Short), 직관적이며(Straight), 간결해야(Simple) 한다는 원칙이다.

공교롭게 S로 시작하는 네이밍의 고려사항으로 강한 느낌(Strong)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고,

독창적(Special)이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니 참고해봐도 좋겠다.

그럼 어떤 상품이나 캠페인 등의 네이밍을 할 때 이런 고려사항들을 먼저 생각하고 이름을 떠올려야 할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창의성과 직관에 기반하여 먼저 여러 가지 이름을 내보고, 3S와 5S의 기준에 적합한지 살펴보는 것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라 하겠다.

또 실무적으로는 특허청 홈페이지에서 이미 등록된 상표인지 반드시 살펴봐야 하고, 간단한 구글링이나 AI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새롭게 제안한 네이밍이 중복은 아닌지 꼭 검증해야 한다.


이론적인 설명이 다소 길었지만, 사다리게임을 넣은 고스톱머니 확률형 상품의 이름은 "복사다리"로 명명하기로 했다.

행운을 상징하는 짧은 단어 '복'을 앞에 붙이고, 복주머니 아바타를 게임머니와 함께 지급했다.

이 상품도 '펑'과 마찬가지로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직관적인 네이밍도 한몫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입사원 시절 이 두 프로젝트를 통해 배운 것은 명확했다.

좋은 네이밍은 단순히 멋진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도 창의성을 발휘하는 균형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폭탄'이 거부당했을 때의 좌절감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그 실패가 없었다면 '펑'이라는 더 나은 답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실패는 단순히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깨달음은, 아무리 좋은 이름이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펑'의 성공은 네이밍만의 결과가 아니었다.

최고 당첨금 상향, 확률 구조 개선, 당첨자 노출 전략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좋은 이름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펑 샀어?', '복사다리 한번 해볼까?'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이름, 그것이 바로 좋은 네이밍의 힘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엑셀 드래그에 신기해하던 그 신입사원은 참 많이 성장했다.

작은 프로젝트였지만, 이 경험은 이후 수많은 프로젝트에서 네이밍의 중요성과 방법론을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결국 큰 기회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펑'과 '복사다리', 이 두 단어는 내게 단순한 상품명 이상의 의미로 남아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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