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KOREA, 우리나라의 이름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네이밍은 918년, 철원의 포정전에서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918년 6월,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태봉의 시중이었던 왕건은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있었다.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 장군들의 추대를 받아 폭정을 일삼던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그는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정해야 했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 후백제, 그리고 이제 막 탄생한 그의 나라, 이렇게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왕건이 물려받은 것은 단순한 정권이 아니었다.
궁예가 만들어놓은 '태봉'이라는 나라였다.
궁예는 901년 처음 나라를 세울 때 '고려'라는 이름을 선택했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다시 911년에는 '태봉'으로 바꾸었다.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고구려 색채를 의도적으로 지워나간 것이다.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의 영향력이 부담스러웠던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고구려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했다.
왕건은 달랐다. 송악 출신의 그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패서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의 가문 자체가 고구려의 유력한 귀족 성씨였던 왕씨였고, 그가 거느린 핵심 세력들은 옛 고구려의 배후지였던 패서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명확한 지향점이 있었다.
한반도를 통일할 정통성,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강력한 상징이 필요했다.
그가 선택한 이름은 '고려'였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가장 강력하고 화려했던 시절'의 기억이 생생했다.
바로 고구려였다.
5세기 장수왕 때부터 고구려는 스스로를 '고려'라 불렀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었다.
그 이름에는 700년 가까운 역사와 광개토대왕,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찬란한 전성기의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왕건은 궁예가 지웠던 그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
'국호를 고려로 환원한다'는 표현이 역사서에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고려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사람들은 즉시 이해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정통 계승자다. 그 영광을 되찾겠다."
왕건은 연호를 '천수'라 정하고, 이듬해인 919년 자신의 고향이자 가문의 터전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겼다.
철원은 궁예의 도읍이었고, 그곳 사람들은 아직 왕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 네이밍 전략은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926년 발해가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수만 명의 유민들이 왕건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고려라는 이름에서 고구려의 후예를 보았다.
993년, 고려의 서희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일 때도 이 정통성은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만일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그대의 나라 동경은 다 우리 경내에 있다." 고려라는 이름 하나로 외교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왕건이 고구려의 강력한 이미지를 활용해 고려라는 이름으로 정통성과 프리미엄을 동시에 확보했던 것은 완벽한 네이밍 전략이었다.
기존의 강력한 브랜드 자산을 빌려와 별다른 설명 없이도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천 년도 더 지난 지금도 좋은 네이밍의 원칙은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밍은 브랜드 마케터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 중 가장 힘들기도, 가장 보람차기도 한 일인 것 같다.
내가 지은 이름을 달고 브랜드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이름에 더해 상표, 로고, 태그라인까지 하나의 완성된 브랜드 세트로 나오게 되는 일련의 과정과 결과는 브랜드 마케팅이라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과정, 특히 네이밍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힘든 일들과 어이없는 일들 때문에 네이밍 업무라면 기피하는 마케터들도 많다.
많은 기업에서 네이밍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아이디어 공모를 통한 집단 지성으로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다.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모으고 의견을 구하는 작업은 분명히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집단 지성이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만들어가고자 하는 브랜드의 지향점에 대한 이해도가 집단보다 담당자에게 더 높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영진들의 입장에서는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근거가 필요할 것이고,
결국 "다른 구성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같은 단순한 피드백을 받고 스티커 붙이기 투표를 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의사결정은 영혼 없는 브랜드를 만들기 딱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집단 지성에 의해 브랜드 마케터의 의도와 다른 이름이 선택된다면,
네이밍에 이어지는 로고, 브랜드 아키텍처, 브랜드 핵심가치 등 여러 가지 브랜드 개발에도 브랜드의 정체성이 반영되기 어려워진다.
내가 보기엔 토종 바둑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강아지인데, 많은 사람들이 찰스라고 불리길 원해서 찰스라는 이름을 지어놓았다고 해서 그 강아지가 외국 견종으로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브랜드 마케터의 생각이 집단 지성보다 항상 우위에 있지 않은 경우도 많기에, 집단의 의견 수렴을 하는 작업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경영진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집단의 투표 결과를 보조적인 자료로 첨부하는 것은 일종의 센스라 하겠다.
의사결정의 단계에서 많은 브랜드 마케터가 가장 큰 시련을 겪게 되는데, 내가 보고했던 임원, 대표님들은 대부분 머릿속에 새로운 브랜드의 이름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소위 말해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맞히기만 하면 돼'라는 뜻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내 생각을 맞혀보고, 마케터 너는 그 답을 해석해 오기만 하면 돼" 같은 피드백을 받는 순간 그동안 공들여 준비했던 네이밍의 이유, 철학, 방향성 따위는 그냥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다.
결국 이름을 결정하는 건 집단 지성도 아니고 브랜드 마케터도 아니고 그 브랜드의 대표자이기에, 그 이름이 감에 의한 것이든 답정너이든 전문가 의견이든 뭐든 어쨌든 대표자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 브랜드 마케터의 숙명이다.
브랜드마케터가 경영진을 설득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은 결국 기본이다.
네이밍의 3S 원칙, 즉 짧고(Short), 직관적이며(Straight), 간결해야(Simple) 한다는 원칙을 따라가다 보면 그냥 예쁘고 좋아서 지은 이름보다 여타 다른 논리보다 훨씬 단단하게 네이밍과 브랜드의 방향성을 설명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나만의 S를 하나 더 해본다면 스토리(Story)다.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면, 또는 이 제품이 무슨 제품인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완벽한 네이밍은 없다고 생각한다.
2017년, 우리 회사는 새로운 셋톱박스를 출시하면서 브랜드를 정하고자 하였다.
완전히 새로운 상품은 아니었고 기능을 조금 더 보완한 제품이었다.
기존의 상품 이름은 '헬로tv UHD스마트'였고, 방송을 녹화할 수 있는 것이 이 상품의 핵심 USP였다.
무난한 이름이다. 스마트. 그런데 그다지 직관적이지는 않다.
무엇이 스마트하다는 건지 이름만 들으면 느낌이 오지 않고 궁금하지도 않다.
너도나도 스마트라고 주장하는 제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름을 정하는 과정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직원들의 투표로 시작했을 리는 없다.
먼저 이 상품의 핵심 USP와 상품 간의 포지셔닝, 타겟을 정리하였다.
핵심 USP는 UHD 채널과 녹화 기능이었고, 우리 회사에서 가장 비싼 방송 상품으로 high tier에 속하는 상품이었다.
그리고 녹화 기능을 주로 쓰는 사람들은 고령자보다는 앱 사용과 기능에 익숙한 젊은 층이 많았다.
'헬로tv UHD' 여기까지는 이름을 그대로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헬로tv OO UHD'라고 변화를 줄 수도 있었지만, 그 경우 브랜드 아키텍처가 흔들려서 다른 상품도 다 바꿔야 하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UHD라는 화질을 말하는 속성 자체가 그다지 훌륭한 USP가 아니어서 강조할 필요가 없는 Selling Point였다.
브랜드 아키텍처 변경 관점에서는 이미 출시된 다른 상품에 HD 또는 FHD라는 화질 속성을 붙이는 건 매우 불필요한 작업이었을 뿐더러, UHD 채널이 5개도 되지 않아서 사실 소비자가 UHD라는 속성만을 보고 방송 상품을 선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나머지 핵심 USP는 방송 녹화 기능 하나였고, 우리는 녹화 기능에 집중해서 네이밍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헬로tv UHD 뒤에 무엇을 붙일지만 정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는 집단 지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주변에서 던지는 많은 아이디어들이 들어왔다.
스마트를 대신할 단어로 제안된 Premium, Super, Pro, Ultra, Better, 2(두 번째니까) 등은 주로 기존 상품보다 티어가 높다는 측면에서 제안된 이름들이었다.
나는 그보다 녹화라는 본질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티어는 우리가 만든 상품 레벨이지 고객이 관심 있어 하는 사항은 아니기 때문이다.
녹화, 녹화, 녹화... 머릿속에 온통 녹화라는 단어만 가득했을 때 연결된 단어는 레코딩(Recording)이었다.
그렇다. 고작 그거였고, 단순했다. 뻔했다.
그런데 녹화 기능을 가만히 보니 빨간색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제안한 이름은 '헬로tv UHD Red'였다.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었다.
먼저, 녹화 버튼의 빨간색을 직관적으로 연상시킬 수 있었다. Straight.
두 번째, Record라는 단어를 짧게 만들 수 있었다. Short.
세 번째, 이미 현대카드 Red라는 브랜드로 빨간색에 high tier 이미지를 만들어 둔 덕분에 간단하게 상위 제품 이미지도 줄 수 있었다. Simple.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유튜브 레드라는 유튜브의 구독 상품이 처음 등장했다.
지금의 유튜브 프리미엄의 전신이기도 한 그 상품은 헬로tv UHD Red보다 한두 달 늦게 나왔다.
물론 서로가 서로를 참고했을 리는 없다.
왕건이 천 년 전 고구려의 이미지를 활용했던 것처럼, 우리도 현대카드 Red라는 기존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활용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좋은 네이밍의 원리는 같았다.
익숙하지만 강력한 이미지를 가진 상징을 빌려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
3S의 원칙에 입각해 잘 만들어진 이름이었기에 논리가 탄탄한 보고서가 나올 수 있었고, 결정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Red의 강렬한 빨강을 활용해 Record라는 글자가 Red로 변하는 광고까지 나오며 헬로tv UHD Red는 성공적으로 런칭할 수 있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어느 시인의 글처럼 이름이 없다면 브랜드도 없다. 부모님은 내 이름을 나에게 물어보고 지어주지 않으셨지만, 브랜드 마케터는 브랜드와 대화하고 어떤 이름이 어울리는지 물어볼 수 있다.
브랜드의 본질을 이해하고, 3S 원칙에 충실하며, 스토리를 담아낸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좋은 브랜드 네임이 탄생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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